라틴어의 쇠퇴와 방언의 시대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일상에서 라틴어가 더 이상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지역마다 서로 다른 방언, 이른바 '모국어'들이 차지했습니다. 오크어(옥시탄어), 프로방스어, 브르타뉴어 등 다양한 언어가 공존했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곳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나머지 언어들은 멸시 어린 뜻을 담아 '파투아(patois)', 즉 촌스러운 방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한편 법률·행정·종교 문서 등 문자 기록에는 여전히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칙령에 앞선 언어 개혁의 흐름
샤를 7세 때부터 왕권은 문서를 더 많은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454년 샤를 7세는 몽틸레투르 칙령을 통해 법률에 관한 입법 문서 등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작성하도록 명했습니다. 후계자 샤를 8세는 물랭 칙령을 통해 그 적용 범위를 판결 기록까지 확장했으며, 루이 12세는 백성들이 법을 원활히 준수할 수 있도록 모든 재판 문서를 민중의 언어로 작성할 것을 포고했습니다. 1535년에는 프랑수아 1세가 루이 12세의 뜻을 이어받아, 그때까지 예외였던 랑그독 지역까지 칙령을 확대 적용했습니다(이쉬르틸 칙령).
1539년

주요 인물: 프랑수아 1세, 기욤 푸예(당시 대법관), 샤를 7세, 샤를 8세, 루이 12세
반포 경위
4년 뒤인 1539년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 프랑수아 1세의 주재 아래 대법관 기욤 푸예가 '사법에 관한 왕실 칙령(Ordonnance du Roy sur le fait de justice)'을 작성했습니다. 왕 소유의 빌레르코트레 성에서 반포되었기에 '빌레르코트레 칙령'이라 불리며, 작성자의 이름을 딴 '기욤 칙령(Guillelmine)'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2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이전 칙령들의 연장선에 있지만, 이번에는 프랑수아 1세가 모든 법률 및 입법·행정 문서를 "프랑스어 모국어로만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공증 문서 등에 여전히 쓰이던 라틴어를 배제함으로써 사법을 종교로부터 분리해 세속화했고, 교회 관할과 세속(평신도) 관할을 구분했습니다. 나아가 모든 사제에게 출생 기록을 의무화하고 신생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도록 규정하여, 오늘날 호적·신분등록 제도의 첫걸음을 마련했습니다. 이 칙령은 양피지에 작성된 필사본 단 두 부만 남아 있으며, 1539년 9월 6일 파리 고등법원(파를르망 드 파리)에 등록되었습니다.
영향과 결과
이 칙령은 행정과 사법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프랑스어가 이후 법률·포고·행정의 공식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함으로써 국민 언어에 대한 인식을 고취했고, 점차 하나의 공통된 국민 정체성을 형성해 갔습니다.
그 후 몇 년 사이 새로운 칙령들이 이를 보강했습니다. 1579년 블루아 칙령은 혼인과 장례의 등록을 규정했고, 1667년 생제르맹 칙령은 대장을 두 벌씩 작성·보관하도록 요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