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탕과 꿀이 널리 쓰이면서 중세의 수많은 요리에는 새콤달콤한 맛이 더해졌다. 14세기 《모두스 왕과 라티오 여왕의 책》 삽화 • 위키미디어 커먼즈
꿀이 가득한 갈대
1099년, 성지 탈환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접근하던 시점, 그들은 '꿀이 가득 찬 갈대'가 자라는 평원을 발견했다. 전혀 알지 못하던 이 식물 덕분에 그들은 몇 주째 그들을 괴롭히던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제1차 십자군의 연대기 작가 푸셰 드 샤르트르(Foucher de Chartres)가 전하는 이 일화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숲에 들어섰을 때 "땅에서 솟아나는 듯한 꿀이 있었다"(사무엘상 14장 25절)고 기록된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십자군이 설탕을 유럽에 소개하다
'꿀 갈대'의 정체는 사탕수수였다. 인도에서는 이미 2천 년 동안 소비되어 온 물품이었다. 재배는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무슬림 상인들을 거쳐 북아프리카와 알-안달루스까지 전해졌다. 5세기경 인도에서 개발된 사탕수수즙을 결정체로 바꾸는 기술은 운송을 한결 수월하게 만들었고, 소비 확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제품을 기독교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후 설탕은 아랍어 이름 '수카르(sukkar)'에서 유래한 '슈가(sugar)'로 불리게 된다.
그럼에도 설탕 소비는 즉각 대중화되지 않았다. 수입품이었던 만큼 값이 비싸 오랫동안 일부 계층만이 누릴 수 있었다. 꿀은 고대부터 요리를 달게 하는 주된 재료였으며, 기독교 세계와 무슬림 세계를 막론하고 중세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꿀로는 소스, 음료, 후식을 만들었고, 시럽과 연고 등 약용으로도 활용되었다. 결국 설탕은 꿀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부 지역에는 대추야자 꿀이나 포도즙(머스트)처럼 다른 감미료도 존재했다.
설탕에 맛을 낸 닭요리
감미료는 중세 미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꿀과 설탕은 밀가루, 달걀, 유지, 치즈, 말린 과일로 만들고 향신료로 풍미를 더한 제과류뿐 아니라 고기 요리에도 쓰였다. 중세 요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블랑망제(blancmange)는 암탉이나 닭가슴살, 쌀가루, 아몬드 우유, 설탕으로 만들고 장미나 오렌지꽃으로 향을 냈다. 기독교, 무슬림, 유대 요리 어디에서든 꿀은 대부분의 스튜와 조림에, 나아가 빵 반죽에까지 첨가되었다.
중세가 진행되며 설탕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꿀과 혼합하는 일도 잦아졌다. 양파, 구스베리, 달걀, 맥주, 와인 등을 조합해 만드는 새콤달콤한 소스에는 생강, 계피, 후추, 소금, 설탕이 자주 더해졌다. 이런 조리법은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가금류, 일부 생선, 심지어 굴에까지 곁들여졌다.
귀하고 비싼 향신료
오늘날 '짜거니'로 분류되는 요리에 설탕이 들어간 점을 의아해할 수 있지만, 중세인의 입맛에는 단것과 짠것의 경계가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 또한 설탕은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양념의 역할을 했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설탕은 신맛이나 쓴맛을 부드럽게 눌러 주었는데, 냉장 없이 수개월간 보관한 고기에서 특히 짙게 배어나는 맛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동시에 다른 향신료의 맛을 조화롭게 보완하기도 했다. 여기에 보관이 쉽다는 장점도 더해졌다. 반면 잼, 마멀레이드, 시럽, 젤리 등에 쓰이는 데는 16세기까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탓에 제약이 컸다.
생강, 대황, 계피처럼 설탕 역시 주로 동방에서 공급되는 이국적인 식품이었기에 소량씩만 사용되었다. 당밀과 황설탕 외에도 정제 정도에 따른 색조로 등급을 나눈 여러 종류의 설탕이 있었다. 간단한 논리지만, 하얄수록 순도가 높고 값도 비쌌다. 앞서 언급한 블랑망제 같은 요리는 그 하얀 빛깔 자체가 명성의 일부였다. 큰 연회에서는 아몬드, 쌀, 향수를 섞은 설탕으로 조형물을 빚기도 했으며, 기독교인들이 적어도 12세기 말부터 마지팬을 알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양왕 대 꿀왕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사회적 위계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15세기 아랍 문헌 《키탑 알-하브(Kitab al-harb)》는 부자의 음식과 가난한 이의 음식이 벌이는 전쟁을 그린다. 각종 고기와 정제빵, 쌀로 무장한 강대한 양왕(King Sheep)의 군대는 우유와 유제품, 버터, 채소, 절임으로 이루어진 꿀왕(King Honey)의 부대와 격돌한다. 음료 담당으로 가난한 진영에 배속된 '슈크르'는 자신이 약으로나 쓰일 처지라고 불평하다가 결국 탈영해 양왕에게 합류하고, 양왕은 그에게 제과 부문을 맡기겠다고 약속하며 "단단한 흰 설탕 갑옷"으로 무장한 채 승리를 거둔다.
주방에서, 특히 서민 가정에서 설탕 사용이 늦게 자리 잡은 데에는 높은 가격만큼이나 식습관의 느린 변화도 한몫했다. 소비가 확산되면서 설탕의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모든 설탕이 같은 품질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생산 여건도 발목을 잡았다. 사탕수수는 시칠리아나 이베리아반도 남부 같은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북아프리카와 동지중해에서 이미 가공된 상태로 수입해야 했다.
설탕의 최종 승리
이런 이유로 유럽 각지가 설탕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없었고, 설탕 사용의 보편화 시기도 지역마다 달랐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설탕은 거의 전 유럽에서 흔한 물건이 되었다. 이 무렵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이 영구 점령에 나선 대서양의 섬들—마데이라, 아조레스, 카나리아 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가 주요 생산 기지로 떠올랐다.
16세기부터 설탕은 꿀과의 오랜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한다.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중세 양봉의 중심지였던 수도원이 해산되면서 꿀 생산이 급감했다. 점차 설탕 가격이 떨어지고 소비는 폭증했다. 16세기에는 무려 18배나 늘어난 것이다. 용도 역시 변화했다. 산미를 잡는 양념으로 메인 요리에 뿌리던 방식 대신, 이제는 엔트르메와 디저트에 쓰이거나, 17세기부터 유행한 커피와 차를 달이는 데 활용되었다. 이렇게 중세에는 값이 비싸 조금씩만 쓰이던 이국적인 양념이었던 설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읽을거리
Sugar, a bittersweet story, E. Abbott, Fides, 2009.
소화와 폐에 좋다?
고대의 디오스코리데스와 갈레노스 같은 학자들은 설탕에 약효가 있다고 믿었다. 무슬림 의사들이 이 개념을 이어받아 기독교 서구에 전수했다. 그 근거는 건강이 네 가지 체액—뜨겁고, 건조하고, 차갑고, 축축한 성질—의 균형에 달려 있다는 당대의 의학관이었다. 설탕은 뜨겁고도 축축한 성질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설탕은 이뇨 작용과 소화 촉진에 효과가 있고 폐 질환도 낫게 한다고 여겨졌으나, 과용하면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13세기 스페인의 의사 아르노 드 빌라노바(Arnaud de Villeneuve)는 설탕의 치료·식이 효능을 활용한 수많은 처방을 편찬했는데, 그중에는 달걀 흰자로 정제한 설탕 시럽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탕수수에서 각설탕까지
대서양 제도와 이후 아메리카의 설탕 정련소들은 사탕수수를 재배·수확하는 밭 바로 옆에 세워졌다. 정련소에는 사탕수수를 짓눌러 즙을 짜내는 맷돌이 갖춰져 있었다. 짜낸 즙은 가마솥에서 끓인 뒤 틀에 부어 결정화시켰다. 초기 정련소에서는 고용 노동자와 노예가 함께 일했지만, 아메리카의 정련소를 움직인 것은 노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