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다르(Nadar)가 1855~1856년경 촬영한 줄 미셸레
1. 위대한 작가다
"진정한 천재이자 일류의 산문 작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미셸레에게 내린 평가는 극찬 그 자체다. 역사가를 작가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고 본 사람은 철학자 사르트르만이 아니다. 미셸레에게 한 권의 책을 바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역시 그를 19세기 프랑스 문학 최고의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인정받은 작가만을 실는 명망 있는 플레이아드(Pléiade) 총서는 미셸레를 목록에 포함시켰는데, 여기서 그는 조르주 뒤비(Georges Duby)와 함께 등재된 유일한 '근대' 역사가다(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 같은 '고대' 역사가들과 함께 이 영광을 나눈다).
미셸레는 역사가 단순한 학문적 작업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과거를 생생하게 되살려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서술에 숨결을 불어넣고, 웅장한 회화를 그리듯 서술하며, 과거 인물들의 내면세계까지 전달하고자 애썼다(동시대의 플로베르가 특기로 삼았던 자유간접화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역사 서술에 강렬한 미학적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미셸레는 과거를 새로운 형태의 문학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역사는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미셸레는, 그 탁월한 문체 덕분에 실제로 독자를 죽은 이들과 동행하는 자리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2. 역사를 사료 연구 위에 세우다
"아름다운 페이지들은 있지만, 역사 연구라는 면에서는 형편없지…" 양적역사의 거장이었던 피에르 쇼누(Pierre Chaunu)는 미셸레에 대한 평을 물었을 때 이처럼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멸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물론 미셸레가 때때로 비판적 검토 없이 아카이브를 읽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아카이브에 의존했던 것이다! 국립기록보관소(Archives nationales) 사료부의 책임자였던 그는 문서들과 직접 접촉했으며, 역사가의 작업이 사료 연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역사서는 과거의 흔적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기존 저작들에만 의존해 집필되었다. 따라서 미셸레의 사료 활용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쉽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 이전에는 매우 빈약했던 역사 연구의 방법론적 요건을 분명히 강화한 인물이다.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 미셸레를 주제로 강좌를 열었던 위대한 역사가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는 그가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나 오귀스탱 티에리(Augustin Thierry) 같은 당대 역사가들에 비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를 지적했다. "오늘날의 상투적 진리들은 어제와 그저께에는 거의 혁명적인 독창성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맺었다. "미셸레는 어떤 전투들을 너무 완벽하게 승리해 버려서, 우리는 그 전투들이 치러져야 했다는 사실조차 이제 생각하지 않습니다."
3. 여성의 역사, 신체의 역사, 환경의 역사를 개척하다
물론 역사학은 발전했다. 지식은 축적되었고, 방법론은 정교해졌으며, 미셸레가 저작에서 펼친 많은 통념들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수많은 현대 역사가들이 끌어다 쓰는 직관의 보고(寶庫)로 남아 있다. 미셸레는 당시 역사 연구가 정치사로 축소되어 있던 상황에서, 오직 정치사에만 관심을 두지 않은 대담한 역사가였다.
심성사의 위대한 옹호자가 된 중세사의 거장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는 미셸레가 중세 서양에 부여한 상상력의 자리, 이른바 '그토록 위대한 꿈의 문명'을 주목했다. 지난 수십 년간 여성사가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미셸레가 이미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였음을 기억하게 된다. 마들렌 르베리우(Madeleine Rebérioux)는 『마녀』(La Sorcière)가 "여성의 역사에 주체성을 부여한 최초의 책"이라고 지적했다. 미셸레는 또한 물질문명에도 관심을 기울여, 20세기 프랑스 역사학의 영광이 될 뤼시앵 페브르와 페르낭 브로델의 아날 학파(École des Annales)의 먼 선구자로 평가받을 만하다. 나아가 그는 각 시대 고유의 질병에 주목하는 등 신체의 역사에도 시선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감각적 지각을 다루는 감성사와 고정된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게 된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환경사가 오늘날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저서 『바다』(La Mer)는 선구적 연구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4. '르네상스'를 발명하다
미셸레에게 인류의 역사는 연속된 시대들로 표식이 남겨진 긴 상승 곡선이다. 그의 눈에 인류는 중세에서 벗어나는 15세기에 비로소 성년에 접어든다. 물론 당시 유럽인들은 여전히 기독교인이었지만, 교회에 대한 밀접한 의존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신의 문제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예술과 과학, 사유에서 거대한 진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도약은 특히 그리스 문헌을 비롯한 고대 텍스트로의 회귀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된다. 고대로 돌아간다는 까닭에 미셸레는 재탄생, 즉 '르네상스(Renaissance)'를 이야기한다. 이 개념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으며 프랑스어는 물론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널리 퍼졌다.
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전쟁 이후 프랑스로 확산되었다고 미셸레는 말한다. 바로 이 전쟁들 속에서 아직 중세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는 예술과 문예의 부흥의 고향과 마주했다. 미셸레는 여기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를 펼쳐 보인다. "이 야만성은 어느 날 아침 무모하게도 이 고도의 문명과 충돌한다. 이것은 두 세계의 충돌이요, 더 나아가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던 두 시대의 충돌이다. 충격과 불꽃! 그리고 이 불꽃에서 솟아오른 불기둥, 그것이 르네상스라 불리는 것이다."
5. 인민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우다
위대한 인물들에만 관심이 쏠리던 시절, 미셸레는 더 이상 왕과 황제, 교황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다. 그와 함께 세계의 변혁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행위자가 등장한다. 바로 인민이다. 미셸레가 몸담았던 문화는 민중 설화에 매료된 예술 운동인 낭만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시대는 또한 민족 감정의 고양으로 표식이 남겨져 있었고, 미셸레 자신은 파리 노동 계급의 수차례 봉기를 직접 목격했다. 시대의 아들로서 그는 인민에게 — 1846년에 인민을 주제로 한 책을 썼던 그 인민에게 — 그동안 프랑스 역사에서 부여되지 않았던 역할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시기를 통과했다.
이 인민은 때때로 미셸레가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바친 잔 다르크(Jeanne d'Arc) 같은 특별한 인물로 구체화된다.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미셸레는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이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새로운 세계를 낳는 순간을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원래 『기초』(La Fondation)라 이름 붙일 계획이었던 『프랑스 혁명사』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