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의 최후: 튈르리 궁 함락

튈르리 궁의 함락과 스위스 근위대 학살로 상징되는 1792년 8월 10일은 사실상 군주제 혁명의 마지막 국면을 장식한 날이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의 강한 압박 속에서 입법의회는 더 이상 진정시키기 어려운 폭동을 앞두고 국왕의 권한 행사를 정지시키고, 루이 16세와 그의 가족을 탕플 감옥에 유폐하며, 현안 처리를 맡긴 임시 집행평의회에 정부 운영을 위임하기로 결정합니다.
아울러 보통선거를 통해 입법의회를 대체할 국민공회를 소집하기로 의결하면서, 왕좌의 몰락은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졌습니다.
9월 학살과 혁명 세력의 분열
승리에 고무된 파리 코뮌은 학살을 직접 조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일련의 참극—이른바 '9월 학살'—을 묵인하고 승인했습니다. 1792년 9월 초, 폭중에게 고용된 소규모 '자의적 재판관' 무리가 감옥과 종교 건물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천 명이 넘는 용의자들을 살해한 것입니다.
혁명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그리고 국경 전선으로 떠나야 하는 병사들이 '귀족으로 가득 찬' 수도에 가족들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이 학살을 부추겼다고 전해집니다. 이 참극은 지롱드파와 9월 학살에 가담한 산악파(몽테뉴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프랑스군이 발미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1792년 9월 20일), 입법의회는 해산하면서 국왕과 혁명 사이의 입헌적 타협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했습니다.
공안위원회의 성립과 변천
뒤무리에 장군의 배반 이후,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중 단통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로베르 리네, 바레르, 캄봉 등이 함께했습니다. 원래 국민공회 내에서 한 달 임기로 선출된 이 위원회는 5월과 6월에 걸쳐 연임·개편되었으며, 5월에는 헌법 제정 준비를 지원하기 위해 5명의 대표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나 7월 개편 과정에서 단통은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여름을 거치면서 점차 혁명력 2년(Year II)의 거대 위원회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카르노, 코트도르의 프리외, 비요바렌, 콜로데르부아, 바레르, 가스파랭, 리네, 쿠통, 생쥐스트, 장 본 생앙드레 등이 그 구성원이었습니다.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까지 이 위원회는 공화국을 구한다는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며 국내외 상황 회복이라는 막중한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위원들이 결속해 있는 한 전능했던 이 기구는 때로 깊은 내분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끝내 서로 반목하며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일반안전위원회: 테러 통치의 토대
공안위원회에 앞서, 1792년 10월 2일에는 일반안전위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일반 경찰 업무, 감옥 감시, 용의자 체포를 담당한 이 기구는 실질적으로 테러 통치가 행사될 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디에나 아마르 같은 강경파 혁명가부터 바이유 같은 온건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향의 인물들이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