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심장부,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 바로 아래에는 2천 년 전의 고대 도시가 잠들어 있다. 공사를 마치고 지난가을 새롭게 문을 연 시테섬 고고학 크립트(Crypte archéologique de l'Île de la Cité)는 대성당이라는 화려한 이웃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이어진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고대 도시의 핵심 유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파리시이족이 세운 도시, 루테티아
단 몇 계단만 내려가면 거대한 돌블록과 성벽 흔적이 전하는 고대의 분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갈리아계 민족인 파리시이족(Parisii)이 세운 루테티아(Lutèce)는 기원전 1세기 중반 로마의 정복 이후 비교적 안정된 중규모 도시로 자리 잡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기(기원전 27년~서기 14년)에 센 강 좌안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1세기 초에는 센 강에 흩어져 있던 여러 섬이 하나로 묶여 오늘날의 시테섬을 이루었고, 그 위에 규모 있는 주거 구역이 들어섰다. 이후 게르만족, 프랑크족, 알레만니족의 침입을 거치며 도시의 성격은 점차 방어 거점으로 바뀌었고, 서기 308년에는 시테섬 전체가 요새화되었다.
좌안의 많은 지역이 버려지면서 돌들은 새 용도로 재활용되었다. 섬을 감싼 성벽 역시 버려진 네크로폴리스(묘지)와 폐허가 된 건축물에서 회수한 커다란 석회암 블록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크립트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목욕장 유적이다. 탈의실과 뜨거운 물을 즐기는 온실 등 고대 로마식 목욕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당시 이 일대는 고대 강변 부두 자리였는데, 밀과 포도주를 실어 나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노트(nautes)'라 불리던 선주 상인들의 주도 아래 센 강을 따라 상업 활동이 크게 번성했다.
지하 관람 동선은 마치 하나의 타임머신 같다. 고대 도시에서 출발한 여정은 점차 근대 파리로 이어진다. 오텔디외(Hôtel-Dieu) 병원의 옛 예배당, 누브-노트르담 거리(rue Neuve-Notre-Dame)의 유적, 고아원(트루베 호스피스) 건물의 기초까지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영상물은 루테티아의 포룸(중앙광장)과 투기장을 3D로 재현해 당시 도시의 풍경을 생생히 되살려 준다. 더불어 카르나발레 박물관 소장품인 노트르담 대성당 모형 두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2000년부터 이 크립트는 공식적으로 카르나발레 박물관 산하에 속해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