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쿠파 강변의 대역전! '사냥꾼' 오스만군이 사냥감으로 전락한 시사크 전투

쿠파 강변의 대역전!  사냥꾼  오스만군이 사냥감으로 전락한 시사크 전투

국경에서 벌어진 결정적 충돌, 시사크 전투

1593년 6월 22일에 벌어진 시사크 전투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국경 지대에서 계엄 상태 속에 반복되던 여러 저강도 교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양측 모두 상당한 병력이 동원되었고, '포식자'로 나선 오스만 군대는 오히려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시사크 포위전의 시작

오스만 제국은 1591년과 1592년에 이미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작은 요새 도시 시사크를 점령하려 시도한 바 있었습니다. 1593년 6월 15일, 그들은 다시 오스트리아 영토를 침공해 요새를 포위했습니다. 요새는 크로아티아인 블라주 두라츠(Blaz Durac)와 마티야 피디치(Matias Fidits)의 지휘 아래 약 800명의 병력으로 방어되고 있었고, 반면 보스니아 베일러베이(총독)인 텔리 하산 파샤(Teli Hasan Pasha)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무려 16,000명에 달했습니다.

오스만군은 곧바로 요새를 완전히 에워쌌고, 텔리 하산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어군은 이미 오스만군의 접근을 외부에 알린 상태였고, 구원군 편성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루페르트 폰 에겐베르크(Rupert von Eggenberg) 중장이었고, 부지휘관으로 크로아티아인 토마스 에르도니(Tomas Erdoni), 그리고 '카르니올라의 아킬레스'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대령 안드레아스 폰 아우어스페르크(Andreas von Auersberg)가 합류했습니다. 문제는 이 구원 '군대'의 규모가 고작 5,000명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포식자가 사냥감으로…

텔리 하산의 부대는 지역 병력, 그중에서도 특히 호전적이고 광신적이라 평가받던 보스니아 무슬림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곧 오스만군은 작은 요새 도시에 포격을 시작했고, 소규모 공격도 거듭 시도했습니다. 6월 21일, 피디치가 전사하면서 방어군의 불안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인 도움이 이미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에겐베르크의 소규모 구원 부대가 시사크에 접근한 것입니다. 오스만군은 적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텔리 하산은 메미 코자 베이(Memi Khoja Bey)를 사바 강의 지류인 쿠파 강 건너편으로 보내 적의 규모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메미는 돌아와 텔리 하산에게 오스트리아군이 수적으로 열세라고 보고했습니다! 한 튀르크 사료에 따르면, 당시 체스를 두고 있던 텔리 하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메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강적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실제 양측의 전력 비율은 무려 1:3에 달했습니다.

어쨌든 텔리 하산은 군대를 정비하고, 포위전을 끊김 없이 유지하기 위해 쿠파 강 양안을 잇는 임시 가교를 엄호하도록 기병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에겐베르크 역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에르도니 휘하의 크로아티아 경기병과 경보병이 선봉에 서고, 아우어스페르크의 부대가 제2진을 이루며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피로 물든 쿠파 강변의 대참사

첫 공격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격퇴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제2진이 전투에 합류하자 오스만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쿠파 강과 오드라 강 사이의 협소한 공간에 몰린 데다, 시사크에 갇혀 있던 방어군마저 성문을 열고 공격해 오자 오스만군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것은 절반뿐이었고, 그마저 무기를 버린 채 황황히 내달리는 처지였습니다. 최소 8,000명의 오스만 병사가 피로 물든 강변에서 학살되거나 익사했습니다. 오만했던 텔리 하산을 비롯해 여섯 명의 지휘관도 전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검을 피해 살아남은 것은 이브라힘 베이(Ibrahim Bey)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술탄 메메트의 조카 또한 전사자 가운데 있었습니다. 전투 자체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이 전투는 당대 가장 치열하고 결과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패배 직후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고, 이 전쟁은 1606년까지 이어졌습니다(긴 전쟁, 또는 13년 전쟁).

승자의 손에는 말 2,000필, 오스만 군기 10개, 그리고 오스만군의 모든 포병 장비가 넘어갔습니다. 승전국의 손실은 포위당한 수비대의 사망자까지 합쳐도 사망·부상 500명을 넘지 않았으며, 아우어스페르크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자기 부대의 사망자를 40~50명으로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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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시사크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