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709년 태양왕의 식탁에서 포도주가 얼어붙던 혹한의 겨울

1709년 태양왕의 식탁에서 포도주가 얼어붙던 혹한의 겨울

리하르트 폰 드라셰-바르틴베르크, 「깊은 겨울」(In Deep Winter), 1923년

루이 14세의 통치는 그 길고도 화려한 기간과 궁정·건축물의 웅장함 덕분에 일반 대중에게 프랑스 군주제의 절정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수많은 전쟁으로 침체에 빠져 있던 말년 통치기에, 프랑스는 1709년 역사상 가장 참혹한 겨울 중 하나를 겪게 된다. 볼테르는 저서 『루이 14세 시대』에서 이 겨울을 "잔혹했다"고 표현했다.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17세기는 소빙하기를 겪던 시기였기에 이 현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1709년의 혹한은 그 정점에 이른 사례였다.

보스 지방에서 영하 25도까지

프랑스는 1701년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이 전쟁은 루이 14세의 차손인 앙주 공작이 1700년 11월 15일 펠리페 5세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벌어진 것이었다. 여러 적국과 맞서 왕국의 경제와 인적 자원을 총동원해야 했던 이 유럽 전쟁은 국가 재정을 크게 갈아넣었고, 이미 한참 전부터 진행되던 경제·인구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500년 만에 닥친 최악의 겨울이 이 위기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베르사유 첫 서기관이었던 피에르 나르본은 자신의 『일지(Journal)』에서 연이은 한파를 이렇게 기록했다.

"1709년의 겨울은 극도로 혹독했다. 서리는 1월 5일 밤부터 시작되어 같은 달 25일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25일에 발생한 일시적인 해빙은 29일까지 지속되며 눈을 녹였지만, 30일에는 서리가 더욱 거세게 되살아나 2월 20일 진짜 해빙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법률가였던 나르본이 언급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 현상의 절정기에 불과하다. 계절 평균치를 크게 밑도는 낮은 기온은 이미 1708년 10월부터 관측되고 있었으며, 한파는 2월 이후에도 이어져 1709년 3월 10일부터 15일 사이 다시금 혹한이 기록되었다. 위기의 정점에서 파리는 영하 16.3도, 보스(Beauce) 지방은 영하 25도까지 떨어졌다. 모든 지표가 위험 수위를 넘어 다가올 위기를 예고했고, 당주 백작은 1709년 2월 4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각 지방에서 온 서신들은 모두 이번 겨울 대한파가 초래한 혼란만을 이야기한다. 많은 포도밭이 얼어붙었고, 밀마저 얼어버릴까 두렵다. 주변 왕국들도 마찬가지다. 몇 년 되지 않아 심은 나무들은 전부 죽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기온을 견딜 준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 극한의 기후 조건은 인구에게 재앙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가장 연약한 사람들, 즉 아이들과 노인들이 먼저 희생되었다. 회고록 작가들은 늘어나는 사망자들을 건조하게 나열한다. 프랑스 원수(元帥) 집행관이었던 수르슈 후작은 1월 8일자 기록에서, 파리의 언 도로 위를 걷다 근위연대 대위가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보고하며 이를 "불행한 사고지만, 그날과 같은 극심한 추위 속에서는 흔히 있던 일"이라고 남겼다. 실제로 당시 여러 곳에서 동사한 시신이 발견되었다.

"서민들은 파리처럼 무더기로 얼어 죽고 있다." 왕의 제수인 팔라티네 부인은 왕국 백성들의 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비극적 일화는 안타깝게도 끝없이 반복되었다. 팔라티네 부인은 추위에 굳어버린 베르사유에서도 2월 2일자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이 나라의 추위는 너무나 끔찍해서, 1606년 이래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파리에서만 1월 5일부터 지금까지 2만 4천 명이 추위로 사망했다."

그리고 3월 2일자 서신에는 더욱 애틋하고 슬픈 이야기를 덧붙였다.

"서민들은 파리처럼 무더기로 얼어 죽고 있다. 물방앗간이 멈춰 버려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어제 파리의 빵집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친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빵집 주인이 그녀를 붙잡으려 하자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내 처지를 안다면 이 빵을 뺏으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옷조차 입히지 못한 세 아이가 빵을 달라고 조르는데, 견딜 수가 없어서 이 빵을 훔친 것입니다.' 여인을 데려갔던 집행관은 그녀에게 집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한 그가 보니 세 아이가 넝마에 둘러싸여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열병이라도 나듯 몸을 떨고 있었다. 맏이에게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문 뒤에 계십니다'라고 답했다. 집행관이 문 뒤를 확인하려다가 소름 돋아 물러섰다. 불쌍한 아버지는 절망에 빠져 목을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매일 벌어진다."

혹한에 대비할 설비가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음에도 베르사유 궁전조차 추위를 피하지 못했다. 생시몽 공작은 잔 속에서 포도주가 얼어붙는 광경을 회고했고, 윅셀 후작부인은 1월 14일 서신에서 "소식이 짧습니다, 경. 추위 탓에 교역도 끊겼습니다… 임페 끝에서 잉크가 얼어붙습니다"라고 적었으며, 팔라티네 부인도 1월 19일 '얼어붙은 자고새'를 언급했다. 궁정 신하들 사이에서도 사망자가 여럿 발생했는데, 이는 분명 혹한이 속도를 냈을 것이다. 태양왕 루이 14세 역시 세월의 침노를 피하지 못했다.

약탈당하는 빵집들

혹한은 농작물에 치명타를 낳았고, 전년도보다도 못한 흉년을 초래했다. 봄에는 밀 부족을 메우기 위해 보리를 파종했고, 정부는 외국으로부터 곡물을 조달하는 데 주력했다. 무엇보다 투기를 막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모든 재고를 신고하도록 명하고, 가격 폭등을 막기 위해 물가를 통제했다. 또한 빵이 배급되었으며, 피에르 나르본의 기록에 따르면 "1709년 4월 19일 의회는 각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주민들의 호적 조서를 작성하여 가난한 이들의 생계를 충당하도록 명령하는 법령을 반포했다"고 한다.

이런 모든 결정에도 불구하고 식량 위기와 연관된 폭동은 피할 수 없었고, 그 중심에는 종종 여성들이 있었다. 여러 빵집이 약탈당했고, 민중은 재무장관 미셸 샤미야르의 파면을 요구했다. 게다가 전쟁은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최전선의 군대마저 먹여 살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 사태는 프랑스 인구 구조에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비슷한 기간 동안 약 10만 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 숫자는 1709년 겨울 이후 한참 뒤에 발생한 사망 원인들까지 합산하면 더욱 커진다. 우선 흉작으로 인한 열악한 영양 상태가 있고, 이질·장티푸스·천연두·괴혈병 같은 질병이 뒤따랐으며, 마지막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1709년 겨울의 여파는 적어도 1710년 6월까지 이어졌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M. 다 빈하(M. da Vinha), 페랭(Perrin) 출판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