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6년, 술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거대한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 남부 모하치 평원에서 러요시 2세 국왕이 지휘하는 소규모 헝가리군을 완파했습니다. 이른바 '영광스러운' 승리 이후 오스만 군대는 죽음과 파괴를 퍼뜨리며 사실상 저항 없이 헝가리 전역을 정복했고, 빈 성벽 아래까지 진격해 포위 공격을 벌였지만 끝내 함락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61년 후, 운명은 같은 전장에서 터키 군대에게도 똑같은 최후를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161년 만의 재회, 제2차 모하치 전투
전투는 1687년 8월 12일에 벌어졌습니다. 로렌 공작 카를 5세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지휘하는 기독교 연합군은 약 5만 명이었습니다. 반면 대재상 사리 술레이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그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오스만군은 전투 초반부터 와해되어 무질서하게 패주했고, 전장에는 1만 명의 전사자와 그에 필적하는 부상자가 널브러졌습니다. 승리한 기독교 연합군의 손실은 고작 600명에 불과했습니다.
제2차 모하치 전투는 첫 번째 전투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여파를 낳았습니다. 이 승리는 단순히 1526년 같은 전장에서 당했던 기독교 세계의 굴욕을 설운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인 전환점이었던 것입니다. 전략적 중요성만 놓고 보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꼽혀야 마땅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전투입니다.
전술적으로 본 승리의 핵심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이 전투의 실질적 승패는 막시밀리안 에마누엘과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이 지휘한 2만 명 규모의 부대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은 오스만군의 첫 번째 공격을 홀로 막아냈고, 루트비히 빌헬름은 이 방어의 성공을 발판 삼아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오스만군을 완전히 궤멸시켰습니다.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 그리고 무엇보다 양측 간의 처참한 손실 격차는 의외로 단순하게 설명됩니다. 유럽의 군사 기술과 전술이 이미 낡은 터키식 전투 방식을 추월했기 때문입니다.
무기의 격차, 그리고 멈춰 버린 발전
시간이 흐를수록 오스만의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유럽 군대에는 현대식 부싯돌 머스킷과 함께, 총열을 막지 않고도 장착할 수 있는 개량형 총검이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형 총검인 소위 '플러그(plug)' 방식은 총구에 꽂아 쓰는 구조였기에 장착하는 순간 사격이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새로운 총검은 장착 상태에서도 발사가 가능해, 보병 한 명이 원거리 사격병이자 백병전의 전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기 체계의 발전은 더욱 효율적인 신형 발사 시스템의 도입과 맞물려 유럽군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안겼습니다. 오스만은 18세기 전반부에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며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고방식과 제도의 경직성 탓에 이 격차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오스만군은 19세기 초까지도 술레이만 대제 시절의 교리와 전술에 묶여 있었습니다. 승리의 열쇠를 다수의 기병 돌격과 예니체리 군단의 맹공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축이 어떤 방식으로든 무력화되는 순간, 패배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하치 평원에 쓰러진 1만 명의 오스만 병사들은 그 대가를 몸소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지배는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1526년 모하치에서 시작된 오스만의 헝가리 정복은, 161년 후 바로 그 평원에서 막을 내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