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두 장미의 전쟁: 랭커스터 vs 요크, 잉글랜드 왕위를 건 30년의 내전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은 1455년부터 1487년까지 약 30년간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련의 내전입니다.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던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서 치러진 이 전쟁은, 양측이 자신들의 왕조를 상징하는 장미 문장을 방패에 새겨 사용한 데서 '두 장미의 전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를,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문장으로 삼았습니다.

양측의 공통된 혈통 외에도 분쟁에는 여러 원인이 작용했습니다.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에 영토를 상실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잉글랜드의 좌절감은 귀족들 사이의 반감을 증폭시켰습니다. 또한 국왕 리처드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폐위되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4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 그리고 에드워드 3세의 자손 중 요크 가문의 조상이 되는 혈통이 존재했다는 점도 왕위 계승 논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원인

에드워드 3세(1312~1377)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왕세자 흑태자 에드워드, 앤티워프의 라이오넬(클래런스 공작), 곤트의 존(랭커스터 공작), 그리고 랭글리의 에드먼드(요크 공작)입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1376년 흑사병으로 요절했고, 그의 아들 리처드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국왕이 통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이 실권을 쥐게 됩니다.

그러나 성년이 된 리처드 2세는 삼촌에게 맞서기 시작했고 모순된 정책들을 펼쳤습니다. 1399년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그의 영지를 몰수했고, 이에 분노한 곤트의 존의 아들 헨리가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리처드 2세가 항복하자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했으며, 폐위된 리처드는 1400년 2월 수수께끼 같은 상황 속에 사망했습니다.

리처드 2세의 정당한 후계자가 아니었던 헨리 4세는 왕위에 대한 여러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계승 서열상 왕위는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증손자인 마치 백작 에드먼드에게 넘어가야 했지만, 헨리 4세는 왕좌를 지켰고 1413년 사망한 뒤 아들 헨리 5세가 뒤를 이었습니다.

헨리 5세는 음모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면서 두 나라의 왕위를 함께 상속받을 자녀를 두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했음에도, 프랑스 왕위는 곧 회복되고 말았습니다.

헨리 6세는 간헐적인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통치 능력에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는 나약한 군주로 평가받았으며, 프랑스 출신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Margaret of Anjou)에게 휘둘리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국왕의 공백기 동안 1454년 잉글랜드 정국의 실권은 요크 공작 리처드에게 넘어갔고, 그는 1455년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은 뒤에도 권력을 내려놓기를 거부하며 '두 장미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투들의 서막을 열게 됩니다.

주요 전투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1455)

요크 공작은 약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최소 3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는 망명길에 올랐으며 국왕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블로어 히스 전투 (1459)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압박 속에 요크 진영이 연합군을 규합해 선제공격을 감행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러드퍼드 전투 (1459)

요크 가문이 다시 공세에 나서 우스터 방향으로 진격했지만, 헨리 6세가 이끄는 왕실군과의 교전 끝에 무너졌습니다. 요크 진영에서 탈영병이 대거 발생했고 요크 공작은 프랑스로 피신했습니다.

노샘프턴 전투 (1460년 6월)

또 한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왕비는 웨일스로 피신해 군대를 재정비했습니다.

웨이크필드 전투 (1460년 12월)

같은 해 말, 요크 공작은 랭커스터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전투 중 전사했습니다. 그의 아들 역시 포로로 잡혀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1461)

이번에는 요크 공작의 아들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랭커스터 가문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1461년 2월 17일)

격전 끝에 랭커스터 진영이 승리하며 헨리 6세를 되찾았습니다.

페리브리지 전투와 토튼 전투 (1461년 3월)

스스로를 국왕이라 선언한 에드워드, 즉 에드워드 4세는 다시 한 번 랭커스터 가문과 맞섰습니다. 토튼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패한 헨리 6세와 왕비, 그리고 왕자는 스코틀랜드로 도피해 9년간 머물렀습니다. 에드워드 4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1483년까지 집권했습니다.

헤즐리 무어 전투와 헥섬 전투 (1464)

요크 진영은 화평을 시도했지만 랭커스터 가문이 이를 거부하면서 북부에서 또다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헥섬 전투 이후 랭커스터 가문의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1465년에는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를 체포해 유폐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 요크 가문이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에드워드 4세의 핵심 지지자였던 워릭 백작은 왕권 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며 왕국 안에서 더 많은 발언권과 권력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왕의 거부에 부딪히자 워릭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정략 결혼 역시 랭커스터 가문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468년 요크의 마거릿이 프랑스의 용담공 샤를(Charles the Bold)과 맺은 혼인입니다.

엣지코트 무어 전투 (1469)

에드워드 4세 즉위 8년 후에 벌어진 이 전투는 워릭이 만든 동맹을 경계하던 국왕의 불안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패배한 에드워드 4세는 헨리 6세가 왕좌로 복귀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즈코트 필드 전투 (1470년 3월 12일)

이번에는 헨리 6세의 군대를 격파한 에드워드 4세가 왕위로 돌아왔고, 이로 인해 워릭은 프랑스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471년 바넷 전투 이후 워릭은 전사했으며 헨리 6세 역시 같은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1474년 에드워드 4세는 용담공 샤를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1483년에 사망했습니다.

왕좌의 최후: 리처드 3세와 헨리 튜더

에드워드 4세에게는 에드워드와 리처드 두 아들이 있었지만, 두 왕자는 너무 어려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섭정으로서 잉글랜드를 다스리게 됩니다. 리처드는 두 왕자를 런던탑에 유폐한 뒤 1483년 여름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이른바 '탑의 왕자들' 미스터리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리처드는 리처드 3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기 없는 군주였고 왕위에 대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야 했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위협은 오언 튜더의 손자 헨리 튜더였습니다.

보즈워스 전투 (1485)

랭커스터 진영의 군대를 이끈 헨리 튜더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전사시키며 장미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헨리 튜더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붉은 장미와 흰 장미 두 가문의 대립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의 막을 열었습니다. 이후 1487년 스토크 전투를 거치며 잔여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었고, 잉글랜드는 새로운 왕조 아래 안정기를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