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재판(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1945년에 설립된 국제법정입니다.
재판은 1945년 11월 20일에 시작되어 1946년 10월 1일에 종결되었으며, 총 185명이 기소되어 이중 35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설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승전국인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은 나치 전범을 심판하기 위한 법정을 설립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의 책임자들이 법정에 세워졌습니다. 연합국은 이를 통해 군사적 승리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판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뉘른베르크라는 도시가 선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당대회를 열며 지지자들을 규합했고, 최초의 반유대주의 법률인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피고석에는 의사와 변호사 39명, 나치당 및 경찰 관계자 56명, 기업인과 경영진 42명, 군 지도자 26명, 장관과 정부 고위 관료 22명이 앉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핵심 인물들은 심판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연합국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했습니다.
친위대(SS) 사령관이자 강제수용소 총감이었던 하인리히 힘러와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담했던 요제프 멩겔레 같은 일부 장교와 의사들은 도주하여 끝내 체포되지 못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내용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살인, 집단 학살, 노예화, 강제 추방, 권력 남용 등 각종 범죄에 연루된 전범들을 기소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재판은 나치 정부 조직이나 군에서 활동했던 24명의 고위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이들은 음모죄, 평화에 대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죄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자신에 대한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은 단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무거운 형량은 대량 학살에 직접 가담했거나,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던 '최종 해결책' 계획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선고되었습니다.
나치 체제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재판에서는 총 219회의 공판이 진행되었고, 법원은 1946년 10월 1일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받은 24명 중 12명은 사형, 3명은 무죄, 3명은 종신형, 4명은 15~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로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같은 나치당 지도부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같은 장관들이 있습니다. 점령지 행정 책임자였던 한스 프랑크, 헤르만 괴링 같은 군 수뇌부 역시 사형을 받았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어떤 영토에서든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국제법과 전쟁범죄 처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비판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여러 법적 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법적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독일인들이 다른 나라의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으면서 영토 관할의 원칙이 깨졌고, 더욱이 원래 금지된 사항인 고발자가 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 법정은 오직 독일 나치만을 전범으로 간주했습니다. 다른 국적이나 다른 정치 이념을 가진 인물은 기소 대상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와 영향
-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