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혁명이란 무엇인가?
영국 혁명(English Revolution)은 1640년부터 1688년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일련의 내전과 정치적 정권 변동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영국 혁명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으며, 그 결과 잉글랜드에는 의회군주제가 확립되었습니다.
한눈에 보는 영국 혁명
영국 혁명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청교도 혁명과 내전(1640~1649)
-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1649~1658)
- 스튜어트 왕조의 복고 –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통치기(1660~1688)
- 명예혁명 – 제임스 2세의 퇴위와 의회군주제의 성립
짧은 기간 동안 두 차례의 대규모 혁명, 즉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이 시기를 복수형으로 '영국 혁명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혁명들의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의회를 통해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
- 성공회 신자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
-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이 부활하는 것을 막는 것
청교도 혁명과 내전(1640~1649)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국왕과 의회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찰스 1세는 국왕 혼자서 의회의 도움 없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대립 끝에 즉위 후 불과 4년 만에 세 차례나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그러던 중 찰스 1세는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강요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교회를 통일하려 했습니다. 이에 스코틀랜드 교회가 반발했고, 국왕은 반대 세력과의 전쟁을 결심합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국왕은 세금 인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세금 징수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신성왕권(君權神授)에 따라 다스리는 국왕이 세금을 거둘 권리가 있는지, 아니면 국민 각계를 대변하는 의회가 있는지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합니다.
수차례의 위협 끝에 국왕과 의회는 각자 군대를 조직해 내전으로 충돌했고, 전쟁은 찰스 1세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의회 내부에서도 다양한 정파가 등장했습니다. 소지주부터 사유재산 폐지론자까지 아우른 '레벨러(Levellers, 평등파)'가 대표적입니다.
레벨러에게 맞선 것은 대토지를 보유한 보수적 지주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디거(Diggers, 파괴파)'라 불리며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의회가 승리했고, 찰스 1세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이 처형은 잉글랜드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 실험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찰스 1세는 자국민의 손에 처형된 최초의 잉글랜드 국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근대화에 힘쓴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로를 건설하고 늪지를 개간했으며, 우편 서비스와 구직 지원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예술과 건축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런던을 위대한 수도로 만들고자 애썼으며, 피터 루벤스 같은 화가를 궁정으로 초빙해 궁전 장식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1649~1658)

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부터 1658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습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전직 의회 의원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화국(Commonwealth)을 수립합니다. 크롬웰의 초기 정책 가운데 하나는 그를 지지했던 부르주아 계급에 직접적인 이익을 안겨주었습니다.
1650년, 그는 영국 상품을 오직 영국 국적 선박으로만 운송하도록 하는 항해법(Navigation Acts)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외국 선박을 배제하고 자국 해운·조선 산업을 육성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크롬웰 역시 의회를 위협적으로 여겨 1653년 의회를 해산했고, 스스로 조직한 군대의 지도자들을 체포·처형하는 등 강경한 통치를 펼쳤습니다. 말년에는 자신의 아들 리처드를 정부 수반으로 앉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가 없었던 리처드 크롬웰은 정국을 이끌지 못했고, 결국 부르주아 계급 스스로 왕정 복고를 요구하게 됩니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잉글랜드에 복귀합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복고(1660~1688)

형제인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스튜어트 가문을 잉글랜드 왕좌에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왕조가 복고되었음에도 잉글랜드의 종교적·정치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찰스 2세는 종교 관용 정책을 공공연히 지지했지만, 프로테스탄트가 주도하는 의회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결국 국왕은 성공회를 다른 프로테스탄트 분파 및 가톨릭보다 우대하는 법률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등은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깊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영국 정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두 정파가 탄생합니다.
- 휘그당(Whigs): 제임스를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배제하려는 입장
- 토리당(Tory): 제임스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려는 입장
당연히 찰스 2세는 토리당 편에 섰고, 휘그당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국왕이 아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해 제임스가 계승할 처지였기 때문에, 조카딸인 메리와 앤은 프로테스탄트로 양육되어야 했습니다.
명예혁명(1688)
명예혁명은 청교도 혁명으로 시작된 잉글랜드 혁명의 시대를 유혈 사방 없이 종식시킨 사건입니다.
명예혁명을 이해하려면 당시 종교와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이 곧 정치적 입장을 결정했기 때문에, 국왕의 종교, 곧 왕국 전체의 종교를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은 의회를 통한 군주 권력의 제한을 옹호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강화만을 환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는 언제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의회는 왕위를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인 딸 메리 공주와 결혼한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넘기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잉글랜드 내 지지 기반을 잃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피합니다. 이후 윌리엄과 메리는 공동 국왕으로 맞이받았고, 곧이어 군주의 권력을 크게 제한하는 의회군주제가 성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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