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인 오귀스트와 루이가 최초의 공개 영화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탄생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노력한 여러 발명가들의 결실이었습니다.
영화의 기원
움직이는 이미지를 얻으려는 시도는 고대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인류는 언제나 그림자에 매료되어 왔고, 이는 그림자극이라는 예술 형식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사진술의 등장으로 종이, 금속판, 유리판 등 어떤 표면에든 이미지를 고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화의 역사는 사진의 역사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화(cinema)'라는 단어의 어원 자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cinema'는 'cinematograph'의 축약형으로, 그리스어에서 온 'cine'은 '움직임'을, 접미사 '-graph'는 '기록하다'를 의미합니다. 즉, '기록된 움직임'인 셈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와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발명가들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투사하는 장치들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기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매직 랜턴(환등기)

17세기에 발명된 매직 랜턴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이용해 렌즈와 빛으로 손으로 그린 유리판 그림을 벽에 투사하는 장치였습니다. 해설자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때로는 음악 반주가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매직 랜턴은 도시 축제의 큰 볼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학문 분야에서도 폭넓게 활용되었습니다.
프락시노스코프

1877년 프랑스인 샤를 에밀 레노(1844~1918)가 만든 프락시노스코프는 원형 장치 안에 연속된 이미지를 배치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기구였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용에 머물렀지만, 1888년 레노는 기계의 크기를 키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관객 앞에서 그림을 상영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공연은 '광학 극장'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상영들은 19세기 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실제로 프락시노스코프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키네토스코프

1894년 미국에서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이 이끄는 공장에서 출시된 키네토스코프는 짧은 필름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며 감상하는 개인용 기계였습니다.
이 발명은 에디슨이 이미지를 저장하고 렌즈를 통해 투사할 수 있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시네마토그래프

발명과 사진에 대한 열정이 있던 오귀스트 뤼미에르(1862~1954)와 루이 뤼미에르(1864~1948) 형제는 시네마토그래프를 개발했습니다. 다른 장치들과 달리 이 기계는 촬영과 투영이 모두 가능해 훨씬 실용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토머스 에디슨의 연구 성과를 알고 있었고, 법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프레임에 사소한 변경을 가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형제의 발명품은 경쟁 제품을 능가했고, 움직이는 이미지를 기록하고 싶은 이들의 선호 장치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영화 상영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진 재료 제조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초기 카메라를 연구하고 개량하여 컬러 사진의 등장에도 기여했습니다. 시네마토그래프를 통해 고정된 카메라로 이미지를 담는 첫 번째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우리가 아는 최초의 영화 상영이 열렸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라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 등 10편의 단편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 La Sortie de l'usine Lumière à Lyon흥미롭게도 뤼미에르 형제 자신은 영화 경력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루이는 포토라마를 발명하고 과학에 헌신했으며, 오귀스트는 생화학과 생리학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서사 영화의 탄생
초기 영화는 다큐멘터리 목적으로만 쓰였고,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른바 '촬영된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선구자가 카메라를 활용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이 장치에서만 가능한 기법과 서사를 창조해냈습니다.
서사 영화의 선구자로는 앨리스 가이블라셰와 조르주 멜리에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앨리스 가이블라셰

영화의 서사적 가능성을 처음 개척한 인물은 프랑스의 앨리스 가이블라셰(1873~1968)입니다. 거의 천 편에 달하는 작품을 남긴 그녀는 민담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영화 <양배추 요정>(1896)을 만들었습니다.
앨리스 가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새로운 발명품을 시연하러 가몽 공장 겸 영화 제작사를 방문했을 때 비서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치에 매료된 그녀는 이중 노출, 카메라 속도의 지연이나 가속 등 흥미로운 효과를 실험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나아가 영화에 컬러와 사운드를 처음으로 활용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907년 카메라맨 허버트 블라셰와 결혼한 그녀는 3년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제작사를 설립하고 스튜디오를 지어 작품을 촬영했습니다. 1920년 이혼 후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연출 경력을 다시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앨리스 가이는 천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현재까지 남은 것은 350편뿐입니다. 여기에는 배우 300명이 출연한 기념비적인 작품 <그리스도의 생애>(1906)도 포함됩니다.
영화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앨리스 가이블라셰는 196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역사학자들이 그녀에게 마땅한 자리를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
조르주 멜리에스

한편, 프랑스의 마술사이자 배우였던 조르주 멜리에스는 컷 편집, 과다 노출, 줌 등 영화적 언어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1861년 파리에서 태어난 멜리에스는 프랑스 수도에서 자신의 극장을 운영하다가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초대로 '시네마토그래프' 시연회를 관람하게 됩니다.
멜리에스는 이 장치를 자신의 공연에 활용하고 싶었지만 형제는 팔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유사한 기계를 구입해 각본을 쓰고 직접 연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극장과 환술의 묘기를 영화에 맞게 발전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최대 히트작은 1902년작 <달세계 여행>으로, 쥘 베른의 유명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혁신 덕분에 멜리에스는 '특수효과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들
- 세계 최초의 영화관은 프랑스 라 시오타의 에덴 극장입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는데, 하객들에게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해 주기도 했습니다.
- 파리 상영 6개월 후인 1896년 7월 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첫 영화 상영이 열렸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브라질 영화의 역사
- 시각예술이란?
- 예술의 종류
- 미디어란 무엇인가
- 사진 사실주의
- 텔레비전의 역사
-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