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석주들이 원을 이룬 웅장한 기념물, 스톤헨지는 런던에서 약 120km 떨어진 잉글랜드 남부의 저지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많은 미스터리가 남아 있는 고고학 유적 중 하나입니다.
스톤헨지는 신석기 시대 영국에서 건설된 수많은 스톤 서클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거석(megalith)들의 원은 수백 년 동안 전문가들을 매료시켜 왔으며, 수많은 신화와 미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기념물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은 거대한 석주들 앞에 압도됩니다. 4,000년 전 이것을 건설했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강렬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스톤헨지란 무엇인가?
스톤헨지는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청동기 시대 초기 사이인 기원전 2950년부터 1600년 사이에 건설되었습니다. 당시 서유럽 전역에서 건설되던 거석 기념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입니다.
현재 스톤헨지는 90개의 큰 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수세기에 걸쳐 약 50개의 돌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스톤헨지의 이미지, 즉 서 있는 돌들이 수평 돌(상인방)을 받치고 있는 원의 모습은 실제로는 훨씬 더 크고 복잡한 기념물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중심에는 작은 말굽형으로 배열된 청색사암(블루스톤)이 있으며, 그 안에는 스톤헨지의 초점 역할을 했던 제단석이 있습니다. 청색사암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5개의 거대한 트릴리톤(trilithon)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말굽형 구조입니다. 각 트릴리톤은 두 개의 거대한 돌기둥 위에 똑같이 거대한 상인방이 얹힌 형태입니다.
트릴리톤은 작은 직립 청색사암들의 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에는 또 다른 원이 있습니다. 이 외곽 원은 한때 30개의 큰 직립석과 같은 수의 상인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트릴리톤과 마찬가지로 '새르슨(sarsen)'이라 불리는 돌로 만들어졌으며, 그중 상당수가 아직도 서 있습니다. 이 중심부 주변에는 흙으로 쌓은 제방과 해자가 있었습니다.
오브리 구멍(Aubrey Holes)
제방 바로 안쪽에서 고고학자들은 지표면 바로 아래 석회암층에 파인 56개의 구멍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이 구멍들은 파인 직후 곧바로 메워졌습니다. 이 구멍들은 오브리 구멍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네 지점에서 구멍의 고리는 '스테이션 스톤(Station Stone)'이라 불리는 직립 청색사암에 의해 끊깁니다. 제방으로 둘러싸인 지역의 주 출입구는 '힐 스톤(Heel Stone)'이라 불리는 큰 돌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스톤헨지는 여러 단계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석회암을 파서 만든 해자와 제방, 오브리 구멍은 기원전 2750년경에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수세기 동안 스톤헨지는 이러한 단순한 형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기원전 2100년경 네 개의 스테이션 스톤이 오브리 구멍과 힐 스톤 사이 중앙에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청색사암이 약 200km 떨어진 웨일스 산맥에서 왔으며, 그 여정의 상당 부분을 뗏목을 이용해 수로로 운송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거대한 트릴리톤과 그것을 둘러싼 새르슨 돌의 원이 놓인 것은 거의 1세기 후였습니다.
거석 세우기: 놀라운 공학의 결정체
이렇게 큰 돌들을 제자리에 놓는 것은 놀라운 공학적 성취였습니다. 우선 돌들은 30km 밖에서 운반되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땅이 딱딱했던 겨울철에 통나무 굴림대를 이용해 운반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이론은 돌들이 특별히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썰매로 운반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적절한 위치에 도착한 돌들은 세워야 했습니다. 경사로, 비계, 지렛대 시스템을 활용해 돌을 수직으로 세운 다음, 특별히 파놓은 구멍에 맞춰 넣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모든 작업에는 분명 수백 마리의 소와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상인방은 돌의 한쪽 끝을 들어 올려 통나무로 받친 후, 반대쪽 끝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며 필요한 높이까지 올린 뒤 기둥 위로 밀어 올리는 방식으로 설치되었습니다. 고대 건축가들은 기둥 상단에 돌돌기를 남겨두고, 상인방 하단에 파낸 홈에 맞춰 돌이 고정되도록 하는 정교한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가장 큰 돌을 들어 올리는 데 약 1,000명이 필요했으며, 스톤헨지 건설의 이 3단계에는 총 200만 시간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기억의 기념물
스톤헨지 주변 지역에는 조상과 족장들을 기리는 많은 기념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을 원형 무덤(영어로 'barrow') 아래에 묻었으며, 종종 금과 청동 유물을 함께 안치했습니다. 스톤헨지에서 남쪽으로 1.6km 떨어진 부시 배로우(Bush Barrow)에서는 키가 큰 인골과 함께 두 자루의 구리 단검, 청동 도끼, 몇 점의 금 장식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영국의 다른 거석 유적들
스톤헨지 주 출입구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는 '디 애비뉴(The Avenue)'로 알려진 제방이 있습니다. 두 개의 평행한 해자가 서로 약 30m 간격으로 떨어져 있으며, 굴착한 흙을 쌓아 두 해자 사이에 높은 길을 만들었습니다.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는 에이버버리(Avebury)가 있는데, 기원전 3000년 직후에 건설된 폭 300m의 거대한 울타리를 해자가 표시하고 있습니다. 에이버버리 내부에는 스톤헨지처럼 새르슨 돌의 원이 있지만 배열 방식이 다릅니다. 에이버버리는 스톤헨지보다 훨씬 큽니다.
에이버버리 근처에는 실버리 힐(Silbury Hill)이라 불리는 인공 흙무덤이 있으며, 스톤헨지와 거의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유사한 기념물이 많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난 4,000년 동안 파괴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서유럽 전역에서 거석 기념물이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작은 돌 원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이는 땅에 박은 나무로 원을 만들던 더 오래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일 수 있지만 나무 유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국 해협 건너 프랑스 브르타뉴의 카르나크(Carnac)에서는 스톤헨지가 건설되던 같은 시기에 수천 개의 직립석 열이 만들어졌습니다. 한 곳에는 7개의 평행한 돌 열이 있으며, 그중 1,029개가 아직 서 있고 1,130m에 걸쳐 뻗어 있습니다. 근처 로크마리아케르(Locmariaquer)에는 쓰러지기 전 22m 높이였던 거대한 화강암 기둥이 있습니다.
드루이드와 스톤헨지
스톤헨지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켈트 사제들, 즉 로마인들이 그레이트브리튼에 도착했을 때 기록에 남긴 드루이드가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약 300년 전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스톤헨지 기원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에 불과합니다.
매년 하지(여름철)마다 현대 드루이드와 돌이 신비하거나 종교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스톤헨지에 모여 한여름날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어떤 고고학적 증거에도 기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스톤헨지가 그들을 한데 모으는 사실은 이 장관을 목격하는 모든 이가 느끼는 마법 같은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스톤헨지는 왜 지어졌는가?
스톤헨지의 목적에 대해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주변 지역의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 시대 초기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민들이 그곳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해자와 돌 사이에서 소수의 매장지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이 지역의 농부와 목축업자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1950~1960년대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천문 관측소이거나 천문 현상을 예측하는 원시적인 수단이었을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실제로 하지인 6월 21일 또는 22일에 태양은 첫 번째 힐 스톤 바로 위에서 거의 정확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 디테일 외에 스톤헨지가 별과 행성과 정렬되었다는 다른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천문 관측소였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스톤헨지를 회의 장소 또는 의식 공간으로 간주하며, 이 지역의 농부와 목축업자들에게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스톤헨지는 자신들이 살았던 영토를 개척했던 조상들에 대한 눈에 보이는 영속적인 기념물 역할을 했습니다. 강력한 족장이 가장 큰 돌들을 세웠으며, 그는 이를 주변 평야 어디에서나 멀리서도 보이는 이 지역 최고의 정교한 기념물로 만들고자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