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는 루이 14세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곧 국가 안에 국왕의 권위 외에 어떠한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입법권은 물론 사법권도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왕이 최고 권위자로서 법을 제정하고 재판을 주관했습니다.
군주는 자신의 통치 권한이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라 주장했는데, 이러한 절대왕정의 극단적 운영은 결국 혼란을 초래하며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루이 14세의 통치
마자랭 추기경이 사망한 후, 후계자 루이는 루이 14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여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한층 강화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무려 72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베르사유 궁정의 과도한 낭비
- 낭트 칙령의 폐지
- 3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승리
- 콜베르 대신의 현명한 재정 행정
- 예술과 문학의 눈부신 발전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궁정의 낭비
루이 14세는 "국가는 곧 나다"라고 말할 정도의 전제군주였으며, 신하들에게는 '태양왕'이라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권이 신에게서 온 것이라 믿었고, 그러한 독재적 통치는 훗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총애하는 인물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파리 근교에 거대한 베르사유 궁전을 건립했습니다. 이 궁전은 약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국왕은 이곳에서 그를 위해 머리를 빗어주고 식사를 올리는 영광을 다투며 아첨하는 귀족들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축제와 사냥에 쏟아지는 무절제한 사치와 낭비는 결국 프랑스 재정 파산의 길을 예고했습니다.
낭트 칙령의 폐지
천주교 신자였던 루이 14세는 종교의 통일을 이루고자 헨리 4세가 반포했던 낭트 칙령(1598)을 폐지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도들이 박해를 받았고 주요 지도자들은 추방당했으며, 6만 명이 넘는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30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승리
프랑스는 30년 전쟁(1618~1648)에 참전하여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을 휩쓴 대규모 종교·정치 분쟁으로, 프랑스는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유럽 최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콜베르의 재정 행정
당시 프랑스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수상 콜베르였습니다. 그는 하루 15~20시간씩 일할 만큼 뛰어난 지성과 비범한 활동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 농업 진흥을 위해 농업법전(Rural Code)을 반포했습니다.
- 돈의 유입과 유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실질적인 예산 제도를 마련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억제했습니다.
- 여러 도시에 공장을 설립하고 상선 및 군함 함대를 발전시켰습니다.
-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을 적극 지원하여, 기사 페르디낭 드 라살이 북미 미시시피 지역을 개척하도록 도왔습니다.
예술과 문학의 융성
17세기는 '루이 14세의 시대'라고 불립니다. 이 시기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배출되고 문학이 크게 번창했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대표적인 작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몰리에르: 희곡 코미디의 대가
- 라신: 그리스풍 비극의 작가
- 라퐁텐: 우수한 우화 작가
- 페늘롱과 라브뤼예르: 감탄을 자아내는 산문 작가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
스페인国王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자신의 친척인 앙주 공작을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습니다. 동시에 루이 14세도 같은 앙주 공작을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이 한 명의 군주 아래 놓이게 될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유럽 열강들을 크게 경계하게 만들었습니다. 앙주 공작은 즉위 후 펠리페 5세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에 잉글랜드, 네덜란드, 독일 제후국, 이탈리아 여러 국가가 연합하여 루이 14세에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 영토에서 치러졌으며, 루이 14세의 군대는 프랑스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루이 14세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 체결을 선택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는 스페인령 지브롤터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루이 14세는 1715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프랑스 군주제의 쇠퇴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즉위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준비되었고, 이는 후계자의 시대에 실제로 폭발하게 됩니다. 베르사유 궁정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국왕의 총애를 받던 퐁파두르 후작부인과 이후의 뒤바리 부인은 국가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했습니다.
수상 슈아죌 공작은 재정 파산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총애하는 여인과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국왕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파리와 프랑스 전역은 철학자와 작가들이 저술을 통해 펼친 혁명 선전으로 인해 매우 격앙된 분위기였습니다. 계몽주의로 알려진 이 시대에는 걸출한 사상가 볼테르, 정치 사상가 몽테스키외 남작과 루소(J.J. 루소)가 활동했습니다.
루이 15세는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그의 손자 루이 16세가 뒤를 이었지만, 프랑스 대혁명 중이던 1793년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