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칠레 독립의 역사: 안데스 대행군에서 마이푸 전투까지

독립 운동의 시작: 1810년 통치 위원회 수립

1810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으로 본국 스페인의 지배력이 무너지자, 산티아고 데 칠레의 공개 회의(카비에르도 아비에르토)에서 자치 통치 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식민지 칠레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기 시작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국방 민병대가 창설되었고, 아르헨티나 출신 지도자 마르티네스 데 로사스의 요청에 따라 발파라이소와 발디비아 항구가 모든 국가의 선박에 개방되며 대외 교역의 문이 열렸습니다.

내분과 '구조국(Patria Vieja)' 시대의 종언

그러나 독립 진영 내부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11년 소집된 의회는 산티아고를 기반으로 한 카레라의 온건파와 콘셉시온을 중심으로 한 로사스의 급진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결국 호세 미겔 카레라가 권력을 장악하고 로사스를 축출했으며, 그는 1813년 페루 부왕 아바스칼에게 패배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한편 망명 생활 중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혁명 사상을 배운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이 리켈메는 스페인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카레라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카레라는 1814년 7월 오히긴스를 전복시켰고,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아바스칼은 이 혼란을 틈타 두 세력을 동시에 공격하여 란카과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로써 칠레 독립 운동의 첫 번째 시기인 '구조국(Patria Vieja)'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안데스 대행군과 차카부코의 승리

오히긴스는 아르헨티나의 장군 호세 데 산마르틴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심합니다. 산마르틴은 칠레를 해방하고, 이어서 바다를 통해 미주 지역 왕당파의 최대 거점인 페루를 해방한다는 웅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814년 산마르틴은 멘도사에 사령부를 설립하고, 2년에 걸쳐 5천 명이 넘는 병력을 철저히 훈련시켰습니다. 이 부대는 파토스 협곡과 우스팔라타 협곡을 통해 말을 타고 안데스산맥을 넘는 놀라운 군사적 위업을 달성했으며, 1817년 2월 12일 차카부코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습니다.

승리의 기세로 산마르틴은 산티아고에 입성했고, 그곳에서 오히긴스를 칠레의 최고 집정관으로 공식 선포했습니다.

마이푸 전투, 칠레 독립의 확정

그러나 왕당파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아바스칼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는 엘칼라오, 탈카우아노, 발디비아에서 전투를 재개했고, 칸차라야다에서 독립군을 기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독립군은 북쪽으로 후퇴했으나 빠르게 재정비하여 다시 전장에 나섰습니다.

드디어 1818년 4월 5일, 산마르틴과 오히긴스는 마이푸 평원에서 왕당파를 완전히 격파했고, 이 승리로 칠레의 독립이 확정되었습니다.

페루 해방으로 이어지다

산마르틴의 계획에 따라 오히긴스는 영국 출신 제독 토머스 알렉산더 코크런이 지휘하는 함대를 조직하여 스페인 해군을 압박했습니다.

이어 1820년 9월, 산마르틴은 불과 4,500명의 병력과 함께 리마 남부에 상륙하여 페루 해방 운동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남미 대륙 전체의 독립을 향한 여정의 중요한 다음 단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