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히틀러를 위해 싸운 소련의 기수들… 코사크와 칼미크인, 왜 스탈린을 배신했나

히틀러를 위해 싸운 소련의 기수들… 코사크와 칼미크인, 왜 스탈린을 배신했나

러시아 땅에는 수 세기 동안 훌륭한 경기병을 '배출'해 온 민족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코사크였고, 이들은 타타르족이나 칼미크족과 같은 여러 아시아 계통 부족들을 따랐다. 코사크는 16세기부터 차르 시절 러시아군에 합류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날 때까지 충성을 다했다.

소련 정권의 탄압, 그리고 독일로의 기울기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볼셰비키가 수립한 새로운 소련 정권의 미움을 사는 결과를 낳았다. 소련 당국은 전통적으로 자유와 무장 전통을 지켜 온 코사크를 잠재적 반체세 세력으로 간주했고, 집단화와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수많은 코사크가 독일 편에 섰고, 독일 부대들은 별도의 계획 없이도 자연스럽게 코사크 기병들을 자기 부대에 흡수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최초의 공식 코사크 부대

1941년 8월, 붉은 군대의 코사크 연대 하나가 통째로 독일군에 투항했다. 이 부대는 독일 육군 최초의 공식 기병 부대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제102 코사크 분견대(102 Kosacken Abteilung)'라 불렸다. 이후 제600 오스트 분견대(600 Ost Abteilung)로 개칭되었고, 마침내 제5 돈 코사크 연대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42년 4월에는 히틀러가 코사크 연대의 정식 창설을 공인했다. 이때 네 개의 연대가 만들어졌는데, 처음 두 개는 남부 집단군 관할 구역에서, 나머지 두 개는 중앙 집단군 관할 구역에서 편성되었다.

한편 XL 기갑군단은 포로 출신 코사크들로 분견대를 꾸렸다. 이들은 훈련을 거쳐 제82 코사크 연대 제1중대가 되었고, 1944년 노르망디 전투에서 전멸할 때까지 독일을 위해 싸웠다.

판비츠와 제1 코사크 기병사단

1942년 9월, 헬무트 폰 판비츠(Helmut von Panwitz) 중령은 상관들에게 코사크 사단 창설을 건의했다. 기병 장교 출신인 그는 이미 루마니아 기병과 함께 작전하는 코사크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새 사단의 창설과 운영을 맡게 되었다.

사단은 1943년 8월에 정식으로 창설되었으며, 다섯 개의 코사크 연대(플라토프, 폰 융거슐츠, 레만, 코노노프, 폰 볼프)를 기반으로 확장되었다. 곧이어 더 작은 부대들이 사단에 합류했지만, 독립을 유지한 부대들도 있었다.

사단의 편제

코사크 사단은 최종적으로 두 개의 여단으로 조직되었고, 각 여단은 세 개의 연대와 승마 포병 중대를 보유했다. 각 연대는 6개의 기병 중대를 두었다. 또한 각 여단에는 81mm 박격포 4문과 중기관총 4정을 갖춘 중무기 중대가 배속되었다.

사단에는 50mm 대전차포를 장비한 대전차 중대도 있었고, 근무·보급 부대들도 이에 맞춰 편성되었다. 화력 면에서는 무장이 가벼운 편이었지만, 연대 하나당 약 2,000명에 달하는 많은 병력이 이를 어느 정도 보완해 주었다.

유고슬라비아로, 그리고 제15 무장기갑척탄병단까지

코사크 사단은 크로아티아로 전개되어 티토의 파르티잔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후 제2사단 창설이 결정되었고, 그 모체는 제1 코사크 사단의 제2여단이 되었다.

1944년 말에는 제3사단 창설이 추진되었고, 세 개의 사단은 최종적으로 제15 SS 코사크 기병군단(XV SS Kosaken-Kavallerie-Korps)으로 통합되었다.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하자 코사크들은 정면으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

배신자들의 처참한 최후

전황이 악화되면서 가장 늦게 창설된 두 개 사단은 해산되었다. 제1사단은 다른 부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철수해 영국군에 항복했지만, 얄타 회담의 송환 협약에 따라 결국 소련 측에 인도되었다. 이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행이었다.

이제 중장이 된 폰 판비츠는 스스로 부하들과 함께 소련으로 넘어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1948년 모스크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칼미크 기병대의 운명

칼미크 기병 부대도 비슷한 방식으로 창설되었다. 독일군이 엘리스타 일대의 칼미크 초원에 도달하자, 총 24개의 칼미크 기병 부대가 편성되어 주로 소련 파르티잔 소탕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독일군의 후퇴를 따라 서쪽으로 밀려나 1945년에는 폴란드에서 베를린 성문 앞까지 전투를 치렀다. 그중 행운아는 전투 중 전사한 이들이었다. 불행한 자들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스탈린의 눈에 이들은 더 이상 동포가 아니라 '반역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