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스페인 내전, 나치와 파시스트는 어떻게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나

스페인 내전, 나치와 파시스트는 어떻게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나

24시간 후, 인민전선 정부는 사임했다. 여러 정치적 조합이 구상되었지만, 저항을 조직할 수 있는 중앙 권력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좌파 극단주의 세력은 반란에 혁명으로 맞서려 했고, 반군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서로에게 맹렬히 대립했다. 처음부터 깊이 분열되어 있던 현 정권은 내부 이견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실패가 예정된 처지였다.

몰라와 프랑코, 예상 밖의 어려움

내전 발발과 함께 스스로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몰라 장군은 왕당파 성향의 나바라 주를 확보하고 마드리드 방면으로 4개 부대를 진격시키는 데 예상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마드리드 내부에서 곧 '제5열'이 협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프랑코 장군은 비행기로 모로코에 도착해 2만 5천 명 규모의 아프리카 군대 지휘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곧 큰 장애물에 부딪혔다. 해군 승무원들이 반란 지지 장교들에게 반기를 들고 함선들을 장악한 것이다. 결국 프랑코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자신의 군대를 스페인 본토로 수송할 수단을 잃고 말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개입 동기

그러나 반군들, 즉 이제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던 세력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 요청을 매우 환영하며 즉각 지원에 나섰고, 전쟁 내내 계속 늘어날 원조를 제공했다.

히틀러는 개입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첫째, 서구 열강의 관심을 스페인으로 돌려 독일의 재무장이 조용히 진행될 여건을 만들고 싶었다. 둘째, 오직 민족주의 정부만 공급에 응할 스페인의 철광석이 필요했다. 셋째, 전략적으로 민족주의의 승리는 지중해 입구에 우익 혹은 준파시스트 국가를 세워 영국과 프랑스의 해상 교통선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무솔리니의 경우는 더욱 분명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노리고 있었고, 우익 스페인 정부가 이 야망을 뒷받침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정부의 출현은 프랑스가 이탈리아 국경에서 병력을 철수하게 만들 수 있으며, 만약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모로코에서 프랑스 본토로 병력을 수송하는 통로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이념적 이유도 컸다. 두 독재자는 공산주의 스페인의 등장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이는 전략적 고려와 맞물린 또 하나의 개입 명분이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의 요청에 호응해 수송기를 제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프리카 군대의 정예 부대가 제때 안달루시아에 상륙해 정부군보다 앞서 나갈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좌절한 반란

북쪽과 북서쪽에서 마드리드로 진군하는 몰라의 부대와 남부 해안에서 이루어진 프랑코 군대의 상륙은, 수도 점령이 이제 시간문제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수도 안에서는 반군의 계획이 실패하고 있었다. 군사조직(U.M.E.)의 계획에 따르면 빌레가스 장군은 7월 18일 토요일 새벽, '질서와 법의 회복'을 구실로 몬타나 병영을 떠나 각 부처, 방송국, 신문사, 기차역, 공항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란의 성패가 불확실해지자 빌레가스는 하루를 더 기다린 끝에 이 임무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그의 후임 호아킨 판후울 장군은 원래 계획의 실행을 시도했지만, 수천 명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권총, 소총, 곡괭이, 도끼로 급조 무장을 하고 병영으로 쏟아져 들어와 그곳에 있던 반군 대부분을 학살했다. 마드리드는 정부의 손에 남았고, 이는 신속한 승리를 확신하던 민족주의 진영에 뼈아픈 좌절이었다.

두 개의 군대, 마드리드를 향하다

2주 후, 민족주의 진영의 최고 사령부인 '국방평의회(Junta de Defensa)'는 두 개의 군대를 공식화했다. 남부의 프랑코 군대와 북부의 몰라 군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의 민간 기업들로부터 무기, 탄약, 폭탄, 수송 차량, 연료를 풍부하게 공급받은 프랑코의 부대는 카디스 북부에서 메리다까지 신속히 진격해 몰라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어 프랑코는 바다호스를 지키던 정부군을 격파해 후방을 안정시킨 뒤, 북동쪽 마드리드 방면으로 진로를 돌렸다.

9월 3일, 프랑코의 부대는 마드리드에서 116km 떨어진 타라베라 데 라 레이나를 포위했다. 수도에 닥친 위기가 너무나 분명해지자, 정부가 '공화파 무장 집단'이라 부르던 주요 세력들도 마침내 도시 방어에 동의했다.

한 달 뒤, 진격을 이어가며 공화파에게 포위돼 있던 톨레도 알카사르를 구출해 낸 프랑코는 국가원수이자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공식 선포되었다. 공화파 측의 새 지도자는 전국노동자연합(UGT)의 수장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였다. 뛰어난 자질을 지닌 노동운동 지도자이자 정치인이었지만, 군사 문제에는 깊이 무지한 인물이었다. 톨레도에서의 패배 이후 공화파 민병대는 극심한 혼란 속에 붕괴했고, 마드리드의 문은 활짝 열린 듯 보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10월 12일에 수도가 자신들의 손에 넘어올 것이라 선언했고, 몰라 장군은 심지어 그날 그라비아 거리의 유명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