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티에르 전투(Battle of Vertières)는 아이티 노예 반란군의 자유를 확정 지은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그들과, 이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기 위해 나폴레옹이 파견한 원정군 사이의 사투였다.
노예 반란과 나폴레옹의 야욕
아이티 노예들은 백인 플랜테이션 소유주들과 그들의 부하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후 분쟁에는 점차 영국과 스페인까지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 노예들을 힘으로 누르고 노예 제도를 되살리기로 결심한다.
그는 르클레르(Leclerc)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부대를 섬으로 파견했다. 르클레르는 배신적으로 혁명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체포해 쇠사슬에 묶어 프랑스로 압송했고, 루베르튀르는 몇 달 뒤 혹독한 학대 끝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르클레르는 병으로 사망했는데, 죽기 전에 르 카프(Le Cap) 지역의 모든 흑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남겼다. 그의 후임 로샹보(Rochambeau)는 흑인 반군을 상대로 더욱 가혹한 작전을 펼쳤다. 흑인 추적용으로 훈련된 15,000마리의 개를 섬으로 실어 나르면서, 수많은 흑인을 바다에 던져 익사시킨 것이다.
장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 휘하에 서게 된 혁명군 역시 이에 필적하는 보복을 감행했다. 프랑스군 포로들을 산 채로 태우고,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토막 내 죽인 것이다. 이런 극한의 대립 속에서 베르티에르 전투가 운명의 분수령이 되었다.
자비 없는 전투
드살린은 수천 명의 반군을 규합해 이미 섬의 3분의 2를 장악한 상태였다. 1803년 11월, 로샹보는 르 카프(당시 명칭은 캅프랑세(Cap-Français), 오늘날의 카프아이시앵(Cap-Haïtien))에 5,000명의 병력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반면 드살린은 무려 27,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구할 수 있는 무기라면 무엇이든 들고 있었지만, 프랑스군과 같은 방식으로 무장하고 훈련된 정규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몇 문 안 되는 포도 함께 보유했다.
1803년 11월 17일 밤부터 18일로 넘어가는 시간, 프랑수아 카포아(François Capois)의 지휘 아래 반군은 베르티에르 요새를 공격했다. 프랑스 진영에 경보가 울리자 카포아는 포화에도 굴복하지 않고 ‘반여단(semi-brigade, 프랑스 혁명 정부가 보병 연대를 일컫던 명칭)’을 이끌고 돌진했다.
베르티에르 요새의 프랑스군 포대도 일제히 발포해 공격 부대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아이티군은 대열을 더욱 두텁게 만들고 용감하게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카포아의 말이 쓰러지자 그는 즉시 일어나 검을 들고 “전진하라, 전진하라”를 외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바로 그 순간, 로샹보는 베르티에르 성벽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 프랑스 장교가 말을 몰아 아이티군 진영으로 달려가 그들 앞에 멈춰 선 뒤 외쳤다. “로샹보 장군께서 이토록 영광스럽게 싸우는 장군께 경의를 표합니다.” 이는 카포아를 향한 말이었다.
전투는 잠시 숨을 고르듯 멈췄다. 프랑스 장교가 아이티군에게 군례를 올리고 물러난 직후, 총성은 다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한편 로샹보는 척탄병들을 전선에 투입했으나, 아이티군은 필사적으로 맞서 프랑스군의 마지막 절박한 공격을 완전히 격퇴했다.
이후 폭풍우가 몰아치자 로샹보는 이를 틈타 패배를 인정하고 퇴각에 성공했다. 양측의 사상자는 각 1,200명으로 거의 비슷했지만,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아이티 입장에서는 더 큰 타격이었다.
자유의 탄생
11월 18일 아침, 로샹보는 장교를 승자들에게 보내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생존한 프랑스군에게는 섬을 떠날 기한 10일이 주어졌다. 프랑스군 부상자들은 현지에 방치되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몇 주 뒤인 1804년 1월 1일, 드살린은 노예제 없는 세계 최초의 국가, 아이티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