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년 12월 18일 새벽, 인도군 항공기들이 국경을 넘어 활주로와 여러 거점을 폭격했다. 동시에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인도 공수부대가 국경선을 넘어 진입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이나 중국 영토를 침공한 것일까?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들이 진입한 땅은 유럽 한 나라, 바로 포르투갈의 영토였다.
르네상스 시대 해양 강국의 흔적
르네상스 시대 포르투갈은 세계 곳곳에 광대한 지배 영역을 펼친 식민 제국이었다.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처음으로 열었던 포르투갈은 일련의 교전 끝에 인도 서해안의 다만(Daman), 디우(Diu), 고아(Goa) 등 요충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는 이에 대응할 힘이 없었고, 이후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상황은 더욱 변하지 않았다.
외교적 압박과 국내 여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는 포르투갈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포르투갈은 이를 거부했다. 이윽고 파키스탄과의 첫 전쟁이 벌어졌고, 파키스탄과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인도는 포르투갈 문제에 집중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며 문제는 다시 표면화됐다. 인도 국민들은 국토 통합과 식민 세력 축출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인도의 핵심 국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네루(Jawaharlal Nehru) 총리는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영국처럼 포르투갈 역시 결국 스스로 떠날 것이라 기대하며 사태를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1955년 8월, 포르투갈령 지역에서 인도 귀속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인도인 시위자 22명이 사망하고 2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여론의 압박에도 네루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1년, 그는 조건이 성숙했다고 판단하고 군사 행동을 결심한다. 공격에 대한 최종 결정은 1961년 11월 말에 내려졌지만, 준비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진행되어 있었다.
인도 공군과 해군은 1961년 6월부터 훈련에 착수했다. 물론 포르투갈과 국제 여론은 이러한 준비 동작을 감지하고 반응했지만, 인도는 미국의 강한 압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은 델리에 포르투갈 영토에 대한 무력 사용을 삼가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게다가 포르투갈은 NATO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에 대한 공격은 자동으로 동맹 헌장 제5조, 즉 피해 회원국을 위해 회원국들이 함께 작전에 나선다는 조항을 발동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네루는 포르투갈령 공격 시 미국과 NATO가 대인도 군사 개입에 나설 위험은 미미하다고 판단했고, 이 판단은 적중했다.
맞서는 양측의 전력
포르투갈 측 역시 인도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최대한의 준비에 나섰다. 인도 내 포르투갈령 총독 마누엘 안토니우 바살루 이 실바(Manuel António Vassalo e Silva)는 리스본으로부터 '마지막 병사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실바 휘하 병력은 약 4,200명. 여기에 노후한 함정 한 척과 소형 초계정 세 척이 있을 뿐이었다.
이에 맞선 인도군은 보병과 전차로 구성된 증강 사단(약 45,000명)을 투입했으며, 전투기 22기와 폭격기 20기가 공중 지원을 담당했다. 해상에서는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척, 프리깃함 6척, 기뢰전 함정 4척이 작전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공격 개시
1961년 12월 17일, 인도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포르투갈군의 통신 시설을 파괴하는 공습이 전투의 막을 올렸다. 해상에서는 1934년에 건조된 포르투갈 함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호가 인도 프리깃함 3척을 상대로 용감하지만 절망적인 항전 끝에 격침되었다.
이윽고 인도군은 세 개 지역 모두에서 큰 저항 없이 장악을 완료해 나갔다. 저항이 있던 곳마다 인도군의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 우위 앞에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인도군의 손실은 전사 22명, 부상 54명이었다. 포르투갈군은 30명이 전사하고 57명이 부상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모두 포로로 잡혔다.
12월 19일에는 사실상 모든 전투가 종결되었고, 마지막 포르투갈 병사가 포로로 잡힌 것은 12월 22일이었다.
국제 반응과 그 후
국제 사회의 반응은 네루의 예측대로였다. 소련은 인도 편에 섰다. 미국은 공격을 공개적으로 규탄했지만, 동시에 쿠바 사태를 처리해야 하는 처지라 그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1974년, 국가를 지배하던 독재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이번 사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포르투갈이 해당 영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포르투갈군 포로들은 가혹한 조건 속에서 약 6개월간 억류되었다가 1962년 5월 석방되어 파키스탄을 경유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고아에 주둔한 포르투갈 식민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