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살인자와 강간범으로 이루어진 나치 SS 최악의 부대, 디를레방거 특수부대의 만행

살인자와 강간범으로 이루어진 나치 SS 최악의 부대, 디를레방거 특수부대의 만행

오스카르 디를레방거(Oskar Dirlewanger)는 자신의 이름을 딴 무장친위대(Waffen-SS) 여단, 즉 제36무장척탄병사단의 지휘관이었다. 히믈러와의 연줄 덕분에 감옥행 대신 '청소' 임무를 맡은 전투부대 지휘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실로 극악무도한 인물이었다.

디를레방거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알코올 중독자였음에도 1923년 나치당에 가장 먼저 입당한 인물 중 하나였다. 1934년에는 미성년자 강간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후 성범죄로 다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고 당에서도 제명되었다.

그러나 히믈러 측근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스페인으로 건너가 프랑코 편에서 싸웠다. 1939년 귀국하여 소위 계급으로 친위대에 입대했고, 폴란드 정복 이후에는 게릴라 소탕 임무를 수행할 부대 창설에 착수했다. 처음 입대한 것은 밀렵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이었다.

1940년 6월 창설된 이 부대는 초기 병력이 겨우 55명에 불과했다. 이후 '전과가 험한' 친위대 부사관 4명과 병사 20명이 추가되었고, 점차 감옥과 징계대대에서 인원이 보충되며 '살인자, 강간범, 강도, 흉기 소지자, 가학피학증 환자', 요컨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인간들이 한데 모였다.

1940년 9월까지 부대 병력은 300명에 달했으며, 처음에는 '디를레방거 특별부대', 이후 '디를레방거 특수대대'로 불렸다. 1942년 초에는 병력이 700명에 이르렀다.

피로 물든 행보

디를레방거와 그의 일당의 활동은 1940년 8월 점령지 폴란드에서 시작되었다. 살인, 구타, 강간이 일상이었다. 1942년 부대는 벨라루스로 파견되어 게릴라 소탕전을 벌였고, 그곳에서 끔찍한 범죄를 자행했다. 디를레방거가 가장 즐기던 방식은 마을 주민들을 집에 가두고 산 채로 불태우는 것이었다. 벨라루스에서만 이 부대는 최소 3만 명의 사망에 책임이 있었다.

1만 5천 명을 살해하는 동안 부대가 잃은 병력은 단 92명뿐이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술에 취한 동료들의 오발 사격이었다. 1942년 9월, 부대는 바라노비치 게토에서 유대인 8,350명을 학살하고, '약탈 혐의'를 빌미로 현지 주민 2,00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 디를레방거 일당의 만행은 심지어 친위대 스스로가 개입해 제지할 정도였다.

한편 형법상 범죄자들과 함께 소련 시민, 전쟁포로, 반공주의자들도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2대대가 창설되고 부대는 연대로 승격되었다. 1943년 5월에는 가장 중한 죄를 지닌 범죄자들로 또 다른 대대가 편성되었다. 이 연대는 반게릴라 작전 '코트부스 작전'에 참여해 다시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작전 기간 동안 2만 명이 살해되었다.

1943년 11월 연대는 전선 투입 명령을 받았으나 259명만 남은 채 해체되었다. 그러나 1944년 2월 말까지 재편성되어 약 900명의 병력을 갖추게 되는데, 말 그대로 독일 감옥에 남아 있던 인간 찌꺼기들을 긁어모은 것이었다. 이 시점부터 소련 국적자의 입대는 금지되었다.

바르샤바를 유린하다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자 부대는 역시 악명 높은 러시아인 카민스키의 석권여단과 함께 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디를레방거는 폴란드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가학적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카민스키의 무리들과 함께 디를레방거의 잔당들은 방화와 약탈, 강간을 일삼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찢었으며, 아기들을 총검으로 찌르거나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바르샤바 볼라(Wola) 지구에서만 4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으며(볼라 학살), 그중에는 현지 병원의 환자와 의료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 공병부대 의용병이었던 벨기에(플랑드르)인 목격자 마티아스 센크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문을 폭파하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약 500명의 아이들이 작은 두 손을 번쩍 든 채 서 있었다. 디를레방거는 부하들에게 전원을 죽이라고 명령했고, 탄약을 아끼기 위해 총개머리판과 총검으로 죽이라고 했다. 피와 뇌수가 길 위에 흘러넘쳤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부대 병력은 3,400명이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이 살인자들에게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으면서 부대의 손실은 극심해 2,733명을 잃었다. 바르샤바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디를레방거는 기사십자장 후보로 추천되기까지 했다.

종말

부대는 곧 재편성되어 4,000명의 병력을 갖추었고, '제2돌격여단 SS 디를레방거'로 개칭되었다. 이 여단은 슬로바키아로 파견되어 슬로바키아 봉기를 늘 하던 방식 그대로 진압했고, 이후 헝가리로 보내져 소련군과 싸웠다.

1945년 2월, 여단을 사단으로 개편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명칭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육군 사단, 공병 부대, 대전차 부대로 증강되었음에도 부대는 결코 사단 규모에 도달하지 못했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베를린 최후 공세가 시작되자 부대는 압박을 받으며 후퇴했고, 다음 날 디를레방거는 중상을 입었다. 4월 25일까지 부대는 사실상 소멸했으며, 대대장이 자기 부하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등 징계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부대의 일부는 할베 포위망에서 소련군에 의해 궤멸되었고, 극소수만이 5월 3일 미군에게 항복할 수 있었다.

생존해 귀환한 부대원은 총 700명으로, 대부분 신분을 숨긴 채 지냈다. 디를레방거는 1945년 6월 프랑스군에 체포되었지만, 체포 사실이 알려지자 같은 달 8일 폴란드 군인들의 손에 직접 처형되었다.

살인자와 강간범으로 이루어진 나치 SS 최악의 부대, 디를레방거 특수부대의 만행

오스카르 디를레방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