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체소라 전투… 초승달 제국을 모욕한 폴란드의 흰 독수리

체소라 전투… 초승달 제국을 모욕한 폴란드의 흰 독수리

몰다비아를 둘러싼 발칸의 격랑

1595년 초, 트란실바니아의 군주 지기스문트 바토리는 몰다비아 공작 '폭군 아론'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아론은 자신의 용병들에게 사로잡혀 바토리에게 '선물'처럼 끌려갔다.

그러나 아론은 오스만 제국(튀르크)의 속국이자 후원을 받던 인물이었다. 튀르크가 즉각 반응하지 않을 리 없었다. 술탄 메메트 3세는 무력으로 몰다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통치자들 간의 분쟁을 한 번에 종식시키기로 결심했다. 술탄의 계획은 몰다비아를 자국에 병합하고, 왈라키아의 왕좌에는 자신의 심복을 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는 폴란드(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폴란드는 남부 국경에서 튀르크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게다가 폴란드는 약 100년 전에 상실한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되찾고자 하는 야심도 품고 있었다.

자모이스키의 몰다비아 원정

이에 1595년 여름, 얀 자모이스키 장군 휘하의 소규모 폴란드군, 즉 기병 5,000명과 보병 2,300명, 그리고 소수의 경포가 몰다비아로 진격했다. 폴란드군은 8월 27일 요충지 호틴을 점령했고, 9월 3일에는 수도 이아시마저 손에 넣었다.

자모이스키는 예레미야 모빌라를 공작의 자리에 앉혔는데, 이는 튀르크와 그 동맹인 타타르족을 막아내는 우호적인 '방패 국가'를 세우려는 전략이었다.

3배에 달하는 이슬람 연합군

폴란드의 움직임에 튀르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술탄 메메트는 타타르의 통치자 가지 기라이 칸에게 몰다비아의 폴란드군 공격을 명했고, 정규 오스만 부대까지 증원으로 파견했다. 이렇게 편성된 이슬람 연합군은 총 25,000명을 상회했으며, 폴란드군을 3대 1 이상으로 압도하는 규모였다.

요새화된 진영에서의 대결

무슬림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한 자모이스키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프루트 강을 건너, 양 측면이 자연적으로 보호되는 곳에 진영을 쳤다. 9월 6일, 그는 요새화된 진영을 구축하고 적을 기다렸다. 폴란드 진영은 매우 견고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3개의 바스티온(방벽)과 출격용 4개의 문을 갖추고 있었다.

9월 18일, 무슬림 군대가 폴란드 요새 진영 앞에 나타났고 곧 첫 교전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가지 기라이 칸은 전 병력을 총동원해 공세에 나섰다. 타타르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지만, 폴란드군은 흔들림 없는 용기와 집중 화력으로 맞섰다.

타타르족은 기병은 많았지만 보병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그들의 기습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마 기병까지 보병처럼 진영 공격에 투입했으나 폴란드 요새를 함락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폴란드군은 짧고 정확한 출격을 반복하며 적을 괴롭히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투는 다음 날에도 같은 양상으로 이어졌다. 타타르와 튀르크는 공세를 이어갔고, 폴란드군은 끝까지 버텼으며, 성벽 앞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지친 가지 기라이 칸은 마침내 공격 중지를 명령하고 자모이스키와의 회담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승자의 조약

폴란드 장군은 회담을 받아들였고, 다음 날 협상은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이 합의는 승리한 폴란드 쪽에 특히 유리한 내용이었다. 패배한 가지 칸은 모빌라를 몰다비아의 통치자로 공식 인정했고, 폴란드가 몰다비아 영내에 수비대를 주둔시킬 권리 또한 인정했다. 9월 23일, 굴욕을 안은 무슬림 군대는 물러나갔다.

체소라 전투… 초승달 제국을 모욕한 폴란드의 흰 독수리

폴란드의 얀 자모이스키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