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데사는 고대 그리스 도시 티라(Tyra)와 올비아(Olbia) 사이에 건설된 흑해 연안의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오늘날에도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이 도시는 루마니아군에게 함락되었고, 당시 약 9만 명의 유대인이 도시 안에 남아 있었다.
점령 직후, 운명을 바꾼 폭발 사건
루마니아군은 두 달간의 격전 끝에 1941년 10월 오데사를 점령했다. 그러나 같은 달 22일, 소련군이 철수하며 남겨둔 지뢰가 루마니아 군정 사령부와 제10보병사단 참모부가 입주해 있던 구 NKVD(소련 비밀경찰) 청사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장교 16명을 포함한 루마니아인 67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희생자 중에는 군정 사령관 글로코네아누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당국은 폭탄 테러의 배후를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사보타주'로 규정했고, 다음 날인 10월 23일,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소속 독일 무장친위대(SS)가 도시에 진입해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했다.
도시 전체가 된 처형장
소수의 독일군은 루마니아 병력의 도움을 받아 도시의 가옥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별, 나이, 종교를 불문하고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즉결 처형하거나 목매달았다. 도시의 대분수광장에서만 100명이 넘는 주민이 처형되었다.
학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슬로보드카(Slobodka) 교외에서 200명, 몰다반카(Moldavanka) 지역에서 251명, 알렉산드롭스키(Aleksandrovsky)에서 400명이 교수형에 처했으며, 수천 명은 창고에 갇힌 채 산 채로 불태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시신 2만 2천 구 이상이 묻힌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달니크 마을의 비극
다음 날, 5천 명의 유대인이 달니크(Dalnik) 마을로 모여들게 되었다. 선두에 서 있던 이들은 데레아누 중령이 지휘하는 루마니아 제10기관총대대 병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루마니아군이 미리 휘발유를 뿌려둔 네 개의 대형 창고에 몰아넣어졌고, 결국 산 채로 불태워졌다.
창고에 수용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날 창고 앞에서 학살당했다. 일부 유대인은 풀려나기도 했지만,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루마니아 점령 첫 주 동안 오데사는 인구의 10%를 잃었다.
보그다노프카 수용소와 슬로보드카 게토
범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루마니아는 보그다노프카(Bogdanovka)에 자체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설립해 5만 5천 명을 수용했다. 이들 전원은 1941년 12월 20일부터 1942년 1월 15일 사이에 루마니아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협력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또 다른 4만 명 정도의 유대인은 오데사 교외 슬로보드카에 조성된 게토에 유폐되었다. 그곳의 사망률은 극에 달해, 이듬해 2월까지 수용자의 거의 절반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을 거두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동 과정에서 사망했고 더 많은 이들이 루마니아군과 독일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탈출에 성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후의 심판
전쟁이 끝난 후 루마니아 학살자 중 두 명의 장군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한 명의 형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오데사 학살은 나치 독일의 절멸 수용소 외에서 일어난 2차 세계대전 최대 규모의 홀로코스트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