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네갈 척후병(Tirailleurs Sénégalais)은 1857년 프랑스 식민지 제국 내에서 창설된 병력 집단으로, '흑인 부대(La Force Noire)'의 핵심 전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4년부터 1918년 사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AOF) 출신 약 20만 명의 '세네갈' 척후병이 프랑스군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이 중 13만 5천 명 이상이 유럽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 가운데 3만 명이 전사했고, 많은 병사가 부상을 입거나 장애를 안은 채 귀국했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 모집된 부대는 이론상 흑인이 아닌 병사들로 구성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흑인 아프리카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모로코 주둔 약 3만 명의 병사 중 1만 5천 명이 흑인). 이들은 망생(Mangin) 장군의 지휘 아래 복무했다.
척후병의 기원
1857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총독 루이 파이에르브(Louis Faidherbe)는 아프리카 신규 영토에서 본토 프랑스 출신 인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세네갈 척후병 부대를 창설했다. 이 칙령은 1857년 7월 21일 플롱비에르레방에서 나폴레옹 3세가 서명했다. 1905년까지 이 부대에는 현지 지배층에게서 값을 치르고 되사들인 노예들이 포함되었으며, 이후에는 전쟁 포로와 다양한 출신의 자원병들도 합류했다. 부사관은 대체로 현지 귀족 출신이었다.
'세네갈' 척후병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들은 반드시 세네갈 출신일 필요는 없었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모집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세네갈의 네 개 완전 자치 프랑스 코뮌에서 태어나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세네갈인들은 척후병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백인과의 완전한 평등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기의 세네갈 척후병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던 자크 시라크는 베르됭 전투 90주년 연설에서, 1914년부터 1918년 사이 구 프랑스 제국 출신 7만 2천 명의 전투원이 전사했다고 언급하며 '모로코 보병, 세네갈·튀니지 척후병, 알제리인, 마다가스카르·오세아니아·인도차이나(코친차이나, 안남 척후병) 출신 병사, 해병대 마르쉐앵(marsouins)' 등을 거론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진행되던 1910년, 망생 대령은 저서 『흑인 부대(La force noire)』에서 식민지 군대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펼쳤다. 같은 시기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새로운 군대』를 발표하며, 출산율 저하로 프랑스인만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으므로 다른 곳에서 병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집의 어려움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 관료들은 신속히 수천 명의 자원병, 혹은 지난 세기와 유사한 방식으로 징집된 병력을 제안했다. 그러나 대도시에서 먼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서는 입대 반발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중 최초의 중요한 봉기는 말리 바마코 인근 바마바라족 사이에서 일어난 것으로, 1915년 봄부터 11월까지 약 6개월간 지속되었다. 이는 이후 더욱 완강한 저항의 신호탄이 되었고, 그중 일부는 1916년 6월 프랑스에 의해 극도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프랑스군은 요새화된 열 개 마을에 포격을 가해, 항복을 거부한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훗날의 여러 반란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항은 외부에 은폐되었다. 독일 선전이 프랑스의 아프리카 통치 행위, 즉 '야만인'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와 유럽 전선에서 싸우게 했다는 비판에 추가 소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부 프랑스 행정관과 식민지 무역에 종사하는 정착민들도 젊은 아프리카인의 징집을 늦추려 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풍부하지 않던 젊은 노동력을 빼앗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
이전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식민지를 군 병력의 저장고로 활용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처럼 독일 측으로부터 만행의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저항 운동가 장 물랭(Jean Moulin)은 1940년 6월, 이러한 부대 중 하나를 보호하려다 체포되었다.
프랑스 론주(Rhône) 샤슬레(Chasselay)에는 '세네갈 타타(Tata sénégalais)'라는 군사 묘지가 있다. 나치 군대가 이곳에서 세네갈 척후병 부대 하나를 학살한 자리다. 에블린 베루에조(Eveline Berruezo)와 파트리스 로뱅(Patrice Robin)은 1992년 이를 소재로 한 영화 『르 타타(Le Tata)』를 만들었다.
1944년 12월 2일에는 세네갈 티아루아(Thiaroye) 수용소에서 수십 명의 세네갈 척후병이 프랑스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우스만 세벵느(Ousmane Sembène) 감독은 1988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티아루아 수용소(Camp de Thiaroye)』를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금 동결 문제
1959년과 1960년, 프랑스 의회는 이른바 '결정화(crystallization)' 메커니즘을 채택했다. 이는 본토 프랑스가 부담해야 할 연금 채무를, 해당 국가들이 독립할 당시의 연금 포인트 가치로 고정해 버리는 방식이었다. 즉, 옛 척후병들의 국적이 된 국가들이 독립한 시점의 가치에서 연금이 동결된 것이다.
거의 50년에 걸친 소송 끝에, 그리고 1943~1945년 유럽에서 북아프리카 부대가 수행한 역할을 그린 영화 『인디제느(Indigènes)』 공개 이후, 프랑스 의회는 마침내 2006년 11월 15일 구 식민지 출신 군인들의 연금을 재조정하는 안을 2007년 참전용사 예산 아래 표결로 통과시켰다. '23개 국적의 8만 4천 명 식민지 참전용사가 혜택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지만, 직접 신청해야만 가능했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