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쪽의 코린트 만과 에게해의 사로닉 만을 총연장 6.3km의 수로로 잇는 코린트 운하는 1881년부터 1893년 사이에 건설된 근대 토목 공학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두 바다를 하나로 잇는다'는 구상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직접 굴착을 시도해 남긴 유적이 오늘날에도 눈에 띄는 만큼, 이 프로젝트의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코린트 지협에 운하 건설을 처음 제안한 인물은 기원전 7세기의 폭군 페리안더였습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착수한 것은 운하가 아니라 디올코스였습니다. 디올코스는 양쪽에 홈이 파인 포장 둑길로, 배를 일종의 원시 운반차인 올코스에 싣고 육지를 가로질러 끌어당기는 시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시설은 서기 1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오늘날에도 현대 운하 옆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약 300년 후, 스트라본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04~303년경 마케도니아 왕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가 운하 개통 작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기술자들이 "코린트 만의 해수면이 사로닉 만보다 높아, 운하를 열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주변 섬에 홍수가 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하자 그는 구상을 접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학계는 이 기술자들이 측정에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왔습니다. 월터 베르너는 1997년 국제학술지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Nautical Archaeology에 게재한 논문에서 이렇게 의문을 던졌습니다.
"왜 그 기술자들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수를 했을까? 혹시 운하 건설에 반대할 별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대 문헌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놀랍게도, 기술자들의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2007년 그리스 파트라 대학 측지학 연구소의 스타티스 C. 스티로스 교수는 '고대 수에즈 운하와 코린트 운하 발굴 후 해안 홍수 위험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 문제를 직접 검증했습니다.
스티로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코린트 지협 양쪽 끝 사이의 해수면 고도는 최대 0.5m까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기술자들이 그 파급 효과를 과대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미세한 고도 차이를 감지해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관측은 결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용할 수 있던 측정 도구를 생각하면 이는 확실히 흥미롭고도 놀라운 성과입니다.
수로에 생길 해류에 대한 예측 역시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코린트 운하에는 약 3노트 속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해류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규모야 작지만, 분명한 해류인 셈입니다.
스티로스 교수는 또한 프로젝트가 좌초된 진짜 원인은 해수면이 아니라 운하 굴착에 필요한 막대한 토사량, 즉 높이 최대 80미터에 달하는 절벽형 벽면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부정적 영향, 특히 해안 지역의 홍수 위험에 대한 과장된 주장은 비판자들이 고대에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도록 몰아붙이는 데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