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클라우젠 전투(1735):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소수 제국군의 역공에 흔들린 프랑스군

클라우젠 전투(1735):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소수 제국군의 역공에 흔들린 프랑스군

우세한 자가 오히려 흔들린 전투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클라우젠 전투는, 병력상 우위에 있던 측이 비극적인 무모함을 보이며 사실상 적과 진지하게 교전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담한 역공에 흔들린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모젤 지역을 둘러싼 양군의 대치

1735년 강력한 프랑스군이 독일 지역을 침공해 트리어(Trier) 방면으로 진격했다. 같은 지역에는 제국 백작 겸 장군 폰 체켄도르프(von Zeckendorf)가 이끄는 오스트리아-독일(제국)군 35,000명이 활동 중이었다. 제국군의 목표는 프랑스군 축출과 모젤(Moselle) 지역 탈환이었다.

일련의 기동전과 소규모 교전에서 승기를 잡은 제국군은 클라우젠(Clausen)으로 진격했다. 선두 부대는 1735년 10월 20일 새벽 4시에 그곳에 도착했다. 한편 드 쿠아니(de Coigny)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보병 50개 대대와 기병 108개 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는 정예 연대에서 척탄병 36개 중대를 차출해 정예 타격 부대를 편성했다.

프랑스군의 이중 포위 시도

벨일(Belle-Île) 공작 휘하의 척탄병은 보병 33개 대대와 68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에슈(Esch) 마을로, 또 다른 병력인 보병 17개 대대와 40개 중대는 리베니히(Rivenich) 마을로 진격했다. 두 마을 인근에는 모젤 강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다. 프랑스군의 목표는 적을 이중으로 압도하는 것이었다.

체켄도르프는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척탄병 10개 중대를 리베니히 다리 방어에 투입했다. 프랑스군은 공격을 개시해 화망 교환 끝에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다리를 확보했으나, 깊이 진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에슈에서도 프랑스군은 다리를 점령했지만 여전히 미적거렸다.

체켄도르프의 역공 준비

체켄도르프는 적장의 소극적인 태도를 역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즉시 리베니히에서 싸우던 부대에 척탄병 5개 중대를 추가로 증원하고, 에슈 남쪽의 요충지에 포병을 배치해 그곳의 다리를 건너는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포격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주로 프랑스 원수의 소극성 덕분에 체켄도르프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헝가리 후사르 기병대도 이 작전에 참여해 크게 활약했다.

싸움도 없이 무너진 프랑스군

드 쿠아니는 다리를 확보한 자기 부대에 제국군이 접근하는 것만 보고도, 압도적으로 우월한 병력으로 증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 없이 후퇴를 명령했다! 프랑스 원수의 또 한 번의 치명적 실패를 틈타 체켄도르프는 부대에 직접 다리를 건너 프랑스군 우익을 위협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의 프랑스 보병은 경악했고, 몇 번의 불발 사격을 가한 뒤 프랑스군 대형 중심부로 후퇴하기 시작해 그곳 부대들까지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드 쿠아니는 전군 후퇴를 명령했다. 그야말로 믿기 힘든 승리였다. 제국군의 손실은 전사 45명, 부상 93명, 실종 3명, 군마 43필에 불과했던 반면, 프랑스군은 약 200명의 손실을 내고 망신스럽게 도주했다!

식량 수송대를 적군으로 착각하다

다음 날인 10월 21일, 드 쿠아니는 다시 체켄도르프의 방어 진지를 살피고 공격하기엔 너무 강고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후퇴를 결정했다. 체켄도르프는 프랑스군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기병 일부를 추격에 파견했고, 기병대는 프랑스군의 수송대마저 나포했다.

드 쿠아니는 적 부대가 좌익을 위협한다는 보고를 받고 더 멀리 후퇴하기로 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위협하던 '적'은 체켄도르프군을 위한 식량과 탄약 수송대였다는 사실…

클라우젠 전투(1735):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소수 제국군의 역공에 흔들린 프랑스군

프랑스군의 드 쿠아니 원수

클라우젠 전투(1735):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소수 제국군의 역공에 흔들린 프랑스군

제국군의 폰 체켄도르프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