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혁명 프랑스의 지도부는 혁명을 유럽 전역으로 '수출'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사실상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 선전포고를 했고, 결국 독일 지방까지 침공에 나섰다. 1796년 6월,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Jean-Baptiste Kléber) 장군이 지휘하는 24,000명의 프랑스군이 라인강 서안, 오늘날 라인란트팔츠주에 해당하는 베스터발트(Westerwald) 지역으로 진격했다.
알텐키르헨의 승리, 베츨라르의 패배
클레베르는 자연적으로 요새화된 요충지에 진영을 설치하고 야전 공사로 방어태세를 한층 강화했다. 그러나 그는 6월 4일 진영을 떠나 오스트리아군을 선제 공격했고, 알텐키르헨(Altenkirchen)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6월 15일, 당시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장이었던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Archduke Charles)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베츨라르(Wetzlar)에서 패배한 것이다. 클레베르는 패배 직후 요새화된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났고, 이후 뒤셀도르프(Düsseldorf)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파울 크라이의 교과서적인 방어 배치
그러나 6월 19일, 일찍부터 명장으로 이름난 파울 크라이(Paul Kray)가 이끄는 14,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 진영을 공격해 왔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반격에 밀려 키르하이브(Kircheib) 마을 일대로 후퇴했지만, 곧바로 마을을 견고한 요새로 재편했다.
크라이는 현명하게 병력을 운용해 마을을 포병 화력이 뒷받침하는 강력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그는 대포를 마을 양옆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마을 뒤편 언덕 위에도 포진시켜 접근하는 적에게 살상 사격을 퍼붙을 수 있게 했다.
정찰 없이 내몰린 프랑스 보병
오스트리아군 진지 앞에 당도한 클레베르는 즉각 공격을 결심했다. 그는 단 네 개 보병대대만이 방어하는 마을과 오스트리아군 제1선을 향해 보병을 투입했다.
문제는 클레베르가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기 전 전장 정찰을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을 뒤 언덕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포병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불과 몇 분 만에 1,500명 손실
그럼에도 클레베르는 병사들의 '혁명적 열정'만 믿고 공격을 강행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선봉 사단들은 문자 그대로 쓸려 나갔고, 불과 몇 분 만에 1,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여기에 상대 오스트리아군이 44,000명이 넘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머지 부대마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크라이는 가용한 모든 병력을 전투 부대에 증원해 적을 현혹했다. 실제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빛을 보지 못한 승리
결국 프랑스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병력에게 겨우 400명의 피해만을 입히고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스트리아군 사령부는 이 승리에 무기력하게 반응했다. 크라이에게 증원군을 보내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섬멸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프랑스군은 뒤셀도르프까지 철수할 시간을 벌었고,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흐름, 나아가 역사마저 바꿀 수 있었던 또 한 번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다.

▲ 오스트리아의 장군 파울 크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