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도 연합 결성을 위한 추가 계획: 사프루 계획부터 간디-진나 회담까지

인도 연합 결성을 위한 추가 계획: 사프루 계획부터 간디-진나 회담까지

사프루 계획(Sapru Yojana)

1944년 12월, 테지 바하두르 사프루(Tej Bahadur Sapru)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영국령 인도의 주(province)와 토번(왕후국)이 제안된 인도 연합에 가입해야 하는지, 아니면 별도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루었다. 위원회는 영국령 인도의 어떠한 주도 연합 가입을 거부할 선택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영국령 인도의 주든 토번이든, 일단 연합에 가입하면 탈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가 영국령 인도 내 어느 주의 분리도 받아들일 수 없듯이, 토번의 분리 역시 허용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프루 위원회에는 토번 측 대표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원회는 토번들이 자발적으로 연합에 가입한다는 원칙 외에는 별다른 권고를 내놓지 못했다. 다만 위원회는 가능한 한 인도의 국가원수를 토번 통치자들 중에서 선출해야 하며, 토번 장관직을 신설하고 이들을 보좌하기 위한 토번 자문위원회를 두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프루 위원회의 구상에 따르면 인도 연합은 주든 토번이든 연방 구성 단위들로 이루어진 단일 국가가 된다. 또한 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토번도 존재할 수 있었으며, 연방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그 어떤 외세도 이러한 단위들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급진민주당(Radical Democratic Party)의 제안

급진민주당 측에서는 M.N. 로이(M.N. Roy)가 독립 인도의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 초안은 1945년 1월 6일 열린 급진민주당 전인도 대회에서 승인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인도 전역에 적용되는 헌법을 선포하고 그 헌법이 인도 토번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과거 영국 정부와 인도 왕공들 사이에 체결된 양자 조약을 활용하여, 인도 왕공들은 일정한 재정 보조금을 대가로 자신들의 권리를 인도 정부에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의 제안

쿠플랜드(Coupland) 교수는 강을 기준으로 삼아 인구 비례에 따라 영토를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술탄 아흐메드 경(Sir Sultan Ahmed)은 인도와 영국 간의 조약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할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나, 이 안에서는 토번 문제에 대한 입장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43~44년에는 아르데시르 달랄(Ardeshir Dalal), 라다 쿠무드 무케르지 박사(Dr. Radha Kumud Mukherjee), 빔라오 암베드카르 박사(Dr. Bhimrao Ambedkar) 등도 각자의 방안을 제시하며 인도의 종교·공동체 갈등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모든 방안에서 토번 문제는 큰 비중을 두고 다뤄지지 않았다.

라자고팔라차리 방안

1944년 5월 6일 간디가 감옥에서 석방되면서 인도를 떠나라 운동(Quit India Movement)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자유당 지도자였던 테지 바하두르 사프루와 라자고팔라차리는 국민회의파와 무슬림연맹 지도부와 협의하며 간디와 진나 사이의 합의를 중개하고자 애썼다. 인도 공산당 역시 간디와 진나가 서로 대립하며 국력을 낭비하는 대신, 인도의 독립을 위해 함께 투쟁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인도 공산당은 전국적으로 '간디-진나 다시 만나라'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라자고팔라차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제안서를 마련했다.

  1. 전쟁 기간 동안 무슬림연맹은 완전 독립 요구를 지지하고, 과도기 임시정부 수립에 국민회의파와 협력해야 한다.
  2. 전쟁이 끝난 후 위원회를 구성해 무슬림 다수 지역의 범위를 확정한다. 해당 지역 주민 전체의 주민투표나 기타 일반적 의사 표현 방식을 통해 별도의 국가가 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모든 정당은 주민투표 전에 자신들의 입장을 알릴 권리를 가진다. 만약 분리가 이루어진다면, 두 국가는 국방, 통상 및 기타 목적을 위해 상호 타협해야 한다.
  4. 인구 이동은 오로지 자발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5. 이 조건들은 영국이 인도 통치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는 경우에 한해 적용된다.

이 제안을 바탕으로 1944년 9월 4일부터 17일까지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간디와 진나의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은 극비리에 서신 교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회담이 끝난 후 관련 서신들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회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의 원인은 진나의 완고함에 있었다. 진나는 어떠한 주민투표도 실시되기 전에, 그리고 영국 통치 하에서 먼저 파키스탄 건국이 확정되는 것을 국민회의파가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진나는 펀자브 전역, 벵골 전역, 북서 변경주, 발루치스탄, 아삼이 모두 파키스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나에게 파키스탄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고, 이 실패로 인도 전역은 깊은 실망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