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청교도들은 어떻게 박해를 받았을까? 영국과 미국 식민지에서의 시련

청교도(Puritans)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실천 때문에 영국과 미국 식민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국교회(성공회)에 대한 반발과 더욱 순수한 개신교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당시 권력층에게 위협으로 여겨졌고, 그 결과 청교도들은 법적 제재와 사회적 배척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 영국에서의 박해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통일 정책

청교도들은 국교인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에 반대하며 더욱 정화된 형태의 개신교를 주장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종교적 통일성을 강제했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청교도들에게는 벌금형, 투옥 등 각종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집회법(Conventicle Act, 1664)

1664년에 제정된 집회법은 잉글랜드 국교회 외부에서 5명 이상이 모이는 종교 집회를 금지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비밀 예배를 계속 진행한 청교도들은 막대한 벌금과 투옥 등 무거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5마일법(Five Mile Act, 1665)

1665년의 5마일법은 성공회 감독의 허가 없이 과거에 설교했던 도시에서 5마일(약 8km)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청교도 목사들에게 금지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많은 청교도 설교자들을 침묵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조치였습니다.

2. 미국 식민지에서의 박해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1630년대 초,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앤 허친슨(Anne Hutchinson)이 이끄는 반율법주의자(Antinomians)와 같은 이견을 가진 종교 집단을 박해했습니다. 허친슨과 그녀의 추종자들은 다른 종교적 견해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식민지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세일럼 마녀재판

1692년에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서 세일럼 마녀재판이 일어나 마술을 행했다고 고발된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200명 이상이 기소되었고, 그중 30명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습니다.

성공회의 지배

버지니아와 같은 일부 식민지에서는 성공회가 국교로 확립되어 있었고, 청교도를 포함한 소수파 신자들은 종교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며 성공회를 지원하기 위한 세금까지 부과당했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굳건했던 신앙

혹독한 박해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끝내 굽히지 않았으며, 영국과 미국 양국의 종교적·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