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마리 피에르 프랑수아 도르센(Jean Marie Pierre François Dorsenne), 즉 르페쥬 백작(1773년 4월 30일 아르드르 ~ 1812년 7월 24일 파리)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장군 중 한 명이다. 근위 척탄병을 지휘하며 '황금의 벽'이라 불릴 만큼 굴하지 않는 용맹함을 보여준 그는, 동시에 '미남 도르센'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진정한 단디이기도 했다.

- 도르센의 초상화
자원병에서 근위대 소령까지
1791년 자원병으로 군에 입대한 도르센은 북방군에서 불같은 열정과 과감한 활약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대위로 승진했다. 이후 라인 전선을 거쳐 이탈리아로 옮겼고, 1797년 3월 16일 탈리아멘토 강 도하 작전에서 보여준 용맹함은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다. 보나파르트는 그를 대대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이집트 원정에 함께 데려갔고, 도르센은 이집트에서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
눈부신 승진의 연속
1805년, 황제는 그를 근위대 소령으로 발탁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다시 한 번 공을 세운 도르센은 같은 해 12월 18일 대령으로, 단 일주일 뒤인 12월 25일에는 준장으로 진급했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몸차림·복장에 대한 남다른 관심 덕분에 군 안에서 '잘생긴 도르센'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806년 말 근위보병 척탄병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아일라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808년에는 르페쥬 백작 작위를 받았다.
에슬링의 상처와 최후
스페인에 잠시 파견되었던 그는 대육군으로 복귀해 레겐스부르크 전역에 참전했으며, 1809년 5월 22일 에슬링 전투에서는 후위 엄호 임무를 수행하던 중 두 필의 말이 차례로 쓰러지고 자신도 머리에 중상을 입었다. 얼마 후 사단장으로 승진한 그는 바그람 전투에서 근위 제2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부대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가 부르고스 총독, 이어 구 카스티야 총독을 역임했고, 베시에르를 대신해 북부 스페인군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에슬링에서 입은 머리 부상의 후유증으로 1812년 초 프랑스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두개골 절개술(트레파네이션)의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

- 도르센
발췌 — 『대육군의 병사들』(Perrin, 1998, J-C 다마메)
"군대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중 하나"로 꼽히던 도르센 장군은 기사 도르세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연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살롱에서는 그녀가 "프랑스에서 가장 잘생긴 남편과 가장 멋진 애인을 동시에 가졌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도르센은 외모, 특히 그 화려하게 빛나는 검은 곱슬머리에 남다른 신경을 쓰던 진정한 의미의 단디였다. 티에보는 어딘가 질투 섞인 시선으로 그를 비판하면서도, 부르고스에서 도르센이 자신의 전속 이발사 '피가로'에게 한 시간 넘게 곱슬머리 손질을 받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솜씨 좋은 이발사는 머리의 절반밖에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티에보는 나아가 도르센의 날씬한 얼굴 뒤에는 우둔함이 숨어 있고, 그 매력적인 실루엣은 교만하고 위선적이며 잔혹한 인물을 가리는 스크린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회고록 작가 티에보의 말을 빌리면, 도르센은 스페인에서 대육군 전체가 싸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적을 프랑스에게 만들어 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둔하든, 우스꽝스럽든, 이 단디 도르센은 틀림없이 대단한 병사였다. 계급도 사회적 지위도 크게 다른 두 기록가가 그에 대해 서로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돌격의 흥분이 칼이 부딪치는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잊게 만들 수 있다 해도, 더욱 희귀한 형태의 용기가 존재한다. 너무나 희귀해서 도르센 단 한 사람에게만 돌려지는 그 용기란, 포탄에 산산조각 나는 자기 연대를 등지고 적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휘파람처럼 스치며 달려오는 죽음을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도르센을 흉내 내려 했던 이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도 등을 돌려 보았다. 하지만 그 자세를 끝내 유지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늘 나를 조종했기 때문이다. 탄환이 날아오는 곳을 반드시 확인하고 말았다." 에슬링에서 도르센을 직접 본 또 다른 이는, 오스트리아 포병의 포화를 정면으로 받아 내는 저 '황금의 벽'을 향한 경외감을 억누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