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퀴에 수도원(Abbaye de Saint-Riquier)은 625년, 다고베르 1세(602~639) 통치기에 센툴라(Saint-Riquier) 총독의 아들 리차리우스(Richarius)가 설립했습니다. 웨일스 출신 선교사 카이독(Caidoc)과 프리코르(Fricor)에게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크레시 숲의 은둔자가 되기 전까지 프랑스 북부 일대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645년경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도원은 처음 뤽쇠유의 성 콜롬바누스의 규율을 따랐고, 7세기 중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위상이 절정에 이른 것은 샤를마뉴(748~814) 치세, 특히 평신도 원장 앙길베르와 니타르가 이끌던 시기였습니다.
생리퀴에 수도원을 재건한 앙길베르

앙길베르(Angilbert, 750~814)는 폰티외 백작 가문의 프랑크 귀족으로, 알쿠인의 제자가 되어 샤를마뉴의 측근으로 들어섰습니다. 황제의 충실한 신하였던 그는 교황 레오 3세의 사절로 세 차례 임무를 완수했으며,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이탈리아 왕 피핀의 교육도 담당했습니다. 뛰어난 학자였던 그는 '호메로스'라는 별명을 얻으며 팔라티노 아카데미의 연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790년, 오랜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생리퀴에 수도원을 하사받은 그는 당대의 모범이 될 수도원으로 재건하는 데 착수했습니다. 새로운 교회군은 안뜰을 중심으로 생소쇠르·생리퀴에 이중 수도원 교회, 생브느와 교회, 생트마리 교회 등 세 개의 성당이 둘러싼 구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00명의 수도사는 세 집단으로 나뉘었고, 99명의 학생 수도사가 스콜라(scola)를 이루었습니다. 전례 생활을 축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 활동이 조직되었고, 여기서 중요한 문서 보관소가 탄생했습니다. 도서관에는 831년 작성된 목록에 따르면 35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샤를마뉴가 앙길베르에게 하사한, 보라색 양피지에 금색 글씨로 온전히 쓰인 생리퀴에 복음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카롤링거 역사의 증인
앙길베르가 사망하자 아들 니타르(Nithard)가 폰티외 백작직을 계승하며 생리퀴에의 평신도 원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앙길베르는 팔라티노 아카데미에서 샤를마뉴의 딸 베르타를 만나 연인이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하르니트와 니타르 남매가 태어났습니다. 니타르는 무인이자 정치가, 그리고 문화인이었습니다. 경건왕 루이(778~840)와 대머리왕 샤를(823~877)에게 충성했던 그는 스트라스부르 맹세(842년 2월 14일)를 주도했으며, 저서 4권 『경건왕 루이의 아들들의 역사』를 직접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841년 퐁트노아앙푸이제 전투에 참전하고, 대머리왕 샤를을 대신해 여러 차례 외교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845년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아버지 곁 생리퀴에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개의 무덤은 1989년 수도원 교회 입구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니타르의 경우 발견된 유골에서 사인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두개골에는 치명적인 타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2012년 3월 9일 생리퀴에 시로 반환된 니타르의 유해는 재안장에 앞서 현재 전시회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수도원은 881년 바이킹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나, 건물은 11세기에 복원되었습니다.
참고문헌
- Pierre Riché, 『카롤링거 왕조, 유럽을 만든 가족』, Pluriel, 2011.
- Jean Favier, 『중세 프랑스 사전』, Fayard.
- 『유럽 이전의 유럽, 카롤링거 왕조』 전시 카탈로그, 201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