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은퇴 궁전, 세르비아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의 모든 것

세르비아 동부 티모크 계곡의 조용한 마을 감지그라드 인근, 고대 다뉴브 국경 방어선(라임스) 근처에는 대규모 로마 정착지의 유적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곳은 후기 로마 제국을 지배한 황제 갈레리우스가 직접 설계하도록 명한 대규모 궁전 단지,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입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발견과 발굴의 역사

이 유적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35년 독일 지질학자 아우구스트 폰 헤르더(August von Herder)에 의해 남겨졌습니다. 이후 19세기 후반, 헝가리 출신 고고학자 펠릭스 필립 카니츠(Felix Philipp Kanitz)는 이곳을 "자신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된 로마 건축물 중 하나"라고 평가할 만큼 그 규모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계적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53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975년에는 당시 발굴을 총괄하던 고고학자 드라고슬라프 스레요비치(Dragoslav Srejović)가 이 궁전이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과 견줄 만한, 갈레리우스 황제의 은퇴용 궁전이라는 사실을 학계에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은퇴 궁전, 세르비아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의 모든 것

'로물리아나' 비문이 밝혀낸 진실

결정적인 증거는 1984년에 나왔습니다. 단지 내부에서 '로물리아나(Romuliana)'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갈레리우스가 근처에서 태어난 어머니 로물라를 기리기 위해 세운 펠릭스 로물리아나임이 확정되었고, 동시에 이 궁전이 황제의 은퇴 거처로 계획되었다는 사실도 입증되었습니다.

학계의 논쟁과 무덤의 발견

다만 모든 전문가가 처음부터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펠릭스 로물리아나를 현재 불가리아 북서부에 위치시키고, 갈레리우스 본인의 무덤은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성 게오르기오스 원형 홀에 있다는 전통적 견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단지 동쪽 출구에서 약 1km 떨어진 인근 마구라 언덕에서 진행된 발굴에서 두 개의 고분이 확인되었고, 이것이 바로 갈레리우스와 그의 어머니의 무덤으로 판명되며 오랜 논쟁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은퇴 궁전, 세르비아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의 모든 것

목동에서 황제까지 — 갈레리우스의 생애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Gaius Galerius Valerius Maximianus)입니다. 그는 훗날 펠릭스 로물리아나를 세운 이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일부 자료는 현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였던 세르디카 출생 가능성도 언급합니다), 트라키아인 아버지를 따라 가축을 치며 성장했습니다.

이후 로마 군대에 입대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서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테트라르키아) 체제를 창설하면서 갈레리우스는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첫 번째 아내 발레리아 막시밀라와 이혼했습니다. 서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동시에 퇴위하자, 갈레리우스는 제국 동방을 관장하는 아우구스투스(정제)로 승격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은퇴 궁전, 세르비아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의 모든 것

289년 착공, 끝내 이루지 못한 은퇴의 꿈

갈레리우스는 서기 289년 궁전 건설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어머니 로물라의 거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자신도 재위 20주년을 축하하는 비켄날리아(vicennalia)를 맞아 313년에 퇴위하는 것이 사두정치 체제가 부과한 의무 중 하나였기에, 이곳에서 은퇴할 계획을 세워두었습니다.

그러나 운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서기 31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보다 앞서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그녀를 인근 마구라 언덕의 고분에 안장했고, 바로 그곳에 자신을 위한 또 하나의 고분이 준비되었습니다.

황제 사후, 유적의 흥망성쇠

갈레리우스 사후 건축 활동은 중단되었고, 펠릭스 로물리아나는 시골의 빌라 혹은 비쿠스(vicus, 촌락)로 남게 되었습니다. 서기 441년 훈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지만, 다음 세기에도 이 일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통치기에는 세례당을 갖춘 대형 대성당으로 재건·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다시 한번 파괴되었고, 새롭게 세워진 정착지는 12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19세기 재발견될 때까지 이곳은 버려진 채 점차 폐허로 변해갔지만, 오늘날에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후기 로마 유적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요새 같은 궁전 — 웅장한 건축 구조

이 단지는 두께가 거의 4m에 달하는 외벽과 높이 약 15m의 요새형 탑 20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더 오래된 내벽 역시 높이 10m의 탑 16기와 두께 1.80m의 벽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중의 요새화된 고리가 궁전을 감싸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두 성벽 사이에는 현관문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신화를 담은 모자이크와 두 개의 신전

단지 내부에는 갈레리우스에게 봉헌된 신전 하나와 그의 어머니에게 봉헌된 신전 하나, 두 개의 궁전, 그리고 신화적 주제의 웅장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랑이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의 은퇴 궁전, 세르비아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의 모든 것

특히 궁전 중 하나의 포르티코(portico, 주랑현관)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된 긴 모자이크와 중앙의 미로 무늬로 완전히 덮여 있으며, 벽면은 대리석과 녹색 반암(포피리),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마감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욕장과 옥좌의 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중앙 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를 말해주는 출토 유물

단지 안에서는 반암으로 조각된 로마 황제들의 초상 조각품과 함께 다수의 고대 동전이 출토되어, 이 유적의 축조 시기를 과학적·문헌적으로 정밀하게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