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오랜 통설이 무너지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MPI) 연구팀의 놀라운 게놈 분석 결과는,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14세기부터 18세기 사이 유럽에서 발생한 모든 주요 역병 사건들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들 것이다.
흑사병균의 직계 후손이었다
연구팀은 1720년부터 1722년까지 마르세유를 강타한 대역병의 원인균인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의 게놈 복원에 성공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 무서운 병원체는 기존에 믿어져 왔던 것처럼 아시아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14세기 유럽을 황폐화시켰던 첫 번째 범유행병, 즉 공포의 '흑사병(Black Death)'을 일으킨 균의 직계 후손으로 밝혀졌다. 1342년부터 1353년 사이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집어삼켰던 바로 그 균이다.
다시 말해, "중세 흑사병의 균은 여러 세기 동안 유럽 현지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파리 고등실용학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 폴 브로카 생체인류학 연구소 소장이자 이번 연구 공동 저자인 고병리학자 올리비에 두투르(Olivier Dutour)는 설명했다.

▲ 화가 미셸 세르(Michel Serres, 1658~1733)가 그린 1720년 마르세유 라 투레트(La Tourette)의 대역병
'쥐만이 범인은 아니다'
치수에서 추출한 병원체 DNA
이번 분석은 18세기 마르세유에서 사망해 역병 희생자 합장묘에서 발견된 여러 유골의 치수(dental pulp)에서 채취한 병원체 성분을 바탕으로 수행되었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마르세유에 나타난 역병의 기원이 1720년 5월 25일 레반트(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도착한 배 '그랑생트앙투아즈(Grand-Saint-Antoine)'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왔다. 이 배의 면직물 화물이 쥐벼룩을 매개로 예르신균에 오염되었고, 승객과 화물에 대한 검역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등 중대한 방관이 겹치면서 질병은 산불처럼 도시 전역으로 번졌다. 그 결과 9만 명의 주민 가운데 4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역병은 이후 프로방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12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 화가 미셸 세르(1658~1733)가 묘사한 1720~1722년 마르세유 페스트 유행의 한 장면. 이 재앙으로 4만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미스터리
그러나 풀리지 않은 의문도 많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갑자기 사라진 정확한 메커니즘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현지에서 균의 영구 저장소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동물들의 완전한 목록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쥐만이 범인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고병리학자 두투르는 덧붙였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페스트
21세기 초 현재에도 전 세계적으로 매년 수천 건의 페스트 발생 사례가 보고되며,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알려진 균주는 19세기 말 중국에서 출현한 균주의 직계 후손으로, 당시 프랑스·스위스 국적의 미생물학자 알렉상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 1863~1943)이 이를 규명한 바 있다.
항생제 치료는 페스트의 치명률을 크게 낮추지만, 내성 균주가 출현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여전히 위협적인 예외로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페스트 발생이 마지막으로 공식 보고된 것은 1945년 코르시카였으며, 이후 서유럽에서는 이 질병이 완전히 박멸된 상태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는 균이 남아 있을까? 러시아 스텝 지대나 중앙아시아의 야생 동물 개체군 속에 페스트균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