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아테네에서 연설한 마크롱, 왜 하필 '프닉스 언덕'을 택했나

민주주의의 요람에서 택한 상징적 무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그리스를 이틀간 공식 방문하던 중인 2017년 9월 7일 목요일, 아테네의 프닉스(Pnyx) 언덕 위에서 중요한 연설을 가졌다. 그는 왜 하필 이곳을 선택했을까? 고대 그리스사 전문가이자 파리 제1대학교 강사인 폴랭 이스마르(Paulin Ismard)에게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리는 이 상징적 장소의 의미를 들어보았다.

아테네에서 연설한 마크롱, 왜 하필  프닉스 언덕 을 택했나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자리한 프닉스 언덕의 모습. 고대에는 시민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M.F. 사르제의 판화(1864년)를 옮긴 그림.

프닉스 언덕은 어떤 곳인가?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의 정치 제도가 확립되면서, 프닉스 언덕은 아테네 전체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에클레시아, ekklésia)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이 도시의 정치 생활에서 가장 혁신적인 제도였던 민회야말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이었다.

이곳은 자유로운 발언과 심의의 경험이 처음으로 구체화된 특별한 장소다. 다만 흥미롭게도, 아테네 민주주의의 심장부는 프닉스 언덕이 아니라 약 400m 아래에 있는 아고라(광장)였다는 점이다.

누가 참석하고 발언할 수 있었나?

부자든 가난하든, 아테네의 모든 시민은 누구나 프닉스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시민'은 성인 남성, 즉 18세 이상의 남성에 한정되었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그 수는 4만 명 조금 넘는 수준으로, 당시 아테네 총 인구 20만~30만 명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여성, 노예, 비그리스계 외국인은 배제되었다 — 편집자 주]

그럼에도 프닉스 민회가 지닌 혁신성은 결코 작지 않다. 당대 다른 그리스 도시들과 아테네의 이전 정치 체제와 비교할 때, 이곳의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부여받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회의가 시작될 때 거행되던 의식 또한 장엄했다. 전령이 집회장 중앙에 서서 다음과 같은 격식 있는 질문을 던졌다. "발언하고자 하는 이는 없는가?" 이후 연설을 원하는 시민은 청중석 중앙으로 나아가 머리에 관을 씌워진 뒤에야 연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프닉스에는 한 번에 약 6,000명의 시민이 수용될 수 있었다.

프닉스 언덕은 얼마나 오래 사용되었나?

아테네의 민주정은 기원전 87년, 로마 장군 술라(Sulla)의 정복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민회는 최소 4개 세기 동안 프닉스 언덕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프닉스의 민회에서 재판받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불경죄로 기소된 이 재판은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재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과두정치가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따라서 민주주의의 반대자로 간주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교육 방식, 즉 제자들을 가르치던 방법 때문에 공격당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