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사회의 '왕공(公侯) 현상'을 상징하는 증거로 꼽히는 유명한 '빅스의 여인(la Dame de Vix)' 무덤은 1953년 발굴 당시 프랑스에서 발견된 최대급 부장품 보물고 중 하나를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이 특별한 유적은 이제 그 발견의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2019년 9월 18일, 부르고뉴 지방 빅스(Vix)에서 '빅스의 여인'이 발견된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고고학자들.
'빅스의 여인'은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켈트 공주의 무덤과 유명한 보물들이 부르고뉴에서 발견된 지 66년이 지난 지금, 고고학자들은 다시 땅을 파고들어 당시 서두르듯 진행됐던 발굴 조사를 재개했습니다. 그 목적은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사회의 역사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1953년 겨울, 세느강 발원지 근처의 발견
1953년 겨울, 세느강 발원지 근처 한밭 한가운데서 교수 한 명과 농업 노동자가 진흙 속에서 거대한 무덤을 끌어올렸습니다. 그 안에는 기원전 500년경 매장된 여성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전차에 누워 있던 그녀는 금제 목걸이인 토르크(torque), 금·산호·호박으로 장식된 청동 피뷸라(fibulae) 등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고, 곁에는 높이 1.6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그리스식 크레이터(krater)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고대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청동 용기입니다. 손잡이는 고르곤 조각으로, 몸체에는 전차와 말 장식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현재 부르고뉴 샤티요네 지역 박물관(Musée du Pays Châtillonais)에 소장된 빅스 크레이터. 높이 1.64m, 무게 208.6kg에 달하는 이 두드려 성형한 청동 용기는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진정한 기술적 걸작으로, 포도주를 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53년 빅스의 켈트 공주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Brule/SIPA
당시 이 발견은 20세기 프랑스 최대의 켈트 유적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빅스의 여인'은 파리 매치(Paris Match)의 표지를 장식했고, 그 모습이 담긴 우표도 인쇄되었습니다. 하지만 발굴 작업 자체는 오늘날의 과학적 기준과는 거리가 먼, 다소 엉성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유물과 뼈는 무덤에서 떼어내 허둥지둥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불과 3주 만에 모든 것이 다시 흙속에 묻혔습니다.
"이 발굴은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참담한 수준이었다"고 CNRS(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소속 고고학자 브루노 쇼메(Bruno Chaume)는 회고합니다. 그 결과 많은 요소들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해 오늘날 연구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저명한 크레이터의 내부로, 말 그대로 털어내져 담겨 있던 음료의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이라면 스캔 검사를 통해 밝혀낼 수 있었을 부분입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무덤 그 자체가 잊혀졌다는 점입니다. 전체 조감 기록도, 지층 조사도 없었습니다. "이 무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실질적인 자료가 부족해, 유적을 덮었던 돌무지(투뮬루스)와 묘실은 발굴되지 않은 채 상상만으로 그려졌습니다."라고 국립 예방고고학연구소(Inrap) 소장 도미니크 가르시아(Dominique Garcia)가 설명합니다.
재발굴의 배경
그래서 나온 해법이 바로 발굴 재개입니다. 가르시아 소장은 "이렇게 특별한 유적에서 진행되는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동결' 상태였던 빅스 무덤의 기록 파일은 사실상 '텅 비어 있었고', 보물을 보관하는 박물관은 이상화된 유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새 프로젝트의 목표는 고대 도시 빅스 기슭에 위치한 이 무덤을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 통합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1철기 시대(기원전 800~460년) 말기, 오스트리아의 발굴 유적 이름을 딴 할흐타트(Hallstatt) 문화라 불리는 서중부 유럽 문화권, 곧 '이 켈트 사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왕공(公侯) 현상
새 프로젝트는 고대 도시 빅스 기슭에 위치한 이 무덤을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 통합하여, 제1철기 시대 말기(기원전 800~460년)부터 이어진 '켈트 사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Juliette Collen/AFP)
2019년 8월 중순 발굴이 재개된 이후 이미 첫 번째 단서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Inrap의 발굴을 지휘하는 바스티앵 드뷔(Bastien Dubuis)는 "이제 돌무지를 세우기 위해 사용된 돌 100%가 현장으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성과를 환영했습니다. 오늘날 평평하게 사라졌지만 당시 이 돌무지는 높이 6~8미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샤티요네 지역 박물관-빅스 보물관의 관장 카트린 모네(Catherine Monnet)는 이런 대규모 석재 운반은 노동력을 통제하는 귀족 사회, 곧 역사학자들이 '왕공(公侯) 현상(princely phenomenon)'이라 부르는 피라미드형 신분 질서 내부의 체계적인 조직이 존재했음을 전제한다고 덧붙였습니다.
2,000제곱미터 규모의 이 거대한 네크로폴리스(묘지군)에서 또 하나의 발견이 이뤄졌습니다. 무덤 근처에서 확인된 두 번째 유적으로는, 공주의 장례 의식에 봉헌된 단상일 가능성, 혹은 그녀의 조상 중 한 사람의 돌무지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박물관 관장은 후자일 경우 "그녀의 권력이 폭넓은 혈통에서 비롯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결과가 2020년 안에 알려질 것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연구를 통해 고고학자들은 세느강 유역을 장악한 강력한 세력의 중심지였던 고대 도시 빅스와 지중해 문명 사이의 연결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권위의 상징인 그리스 크레이터, 발틱산 호박 보석, 금제 토르크의 존재는 "현지산이든 이국산이든 최고급 장인 기술에 값을 치렀다"는 점에서,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려 했음을 보여준다고 가르시아 소장은 설명합니다.
북부와 지중해를 잇는 허브
유럽의 대하천들이 교차하는 경계 지대에 위치한 탓에 빅스는 "북부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허브"로 기능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식민 개척민'으로 불린 그리스인과 로마인, 그리고 켈트인이 구분되어 왔다"면서 "하지만 빅스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인구가 따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서로 연결된 사람들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라고 지적합니다.
2019년 9월 21일(토)과 22일(일) 열리는 '유럽 문화유산의 날'을 맞아 빅스 유적도 함께 문을 엽니다. Inrap 발굴 현장은 21일 토요일 오전 10시~낮 12시, 오후 1시~5시까지 일반인에게 개방됩니다. 또한 11월 15일까지 파리(파리 동역, 몽파르나스역), 마르세유 생샤를역, 렌역에서 고고학 사진 전시회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