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9년 게르마니아(현 독일)에서 벌어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 참전했던 로마 병사의 흉갑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보존 상태로 발견되었다.

1세기 로마 연결식 갑옷 재구성 모형. 독일 칼크리제 출토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
'삐빅' 소리로 시작된 대발견
모든 것은 2018년, 짧은 경보음 하나로 시작되었다. 독일 칼크리제(Kalkriese) 박물관의 고고학자들이 발굴 조사 구덩이에서 금속 탐지기로 흙벽을 스캔하던 중 장치의 알람이 울려 퍼진 것이다. 당시 연구진은 몰랐지만, 이 신호는 곧 그들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이어졌다. 바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완전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로마 갑옷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일 베스트팔렌 토이토부르크 지역, 현재의 칼크리제 숲에서는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왔다. 바로 이곳에서 기원후 9년, 로마 군단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를 겪었다.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Publius Quinctilius Varus)의 지휘 아래 있던 2만 명이 넘는 병력, 즉 군단병 1만 5천 명과 보조병 5천 명(게르마니아 제17·18·19군단)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케루스키족 지도자 아르미니우스(Arminius)가 이끄는 강력한 게르만 부족 연합군에게 패배한 것이다. 이 패배로 로마 제국의 확장 정책은 급격히 중단되었다. 이 학살의 생생한 증거인 수천 점의 무기와 군사 장비 유물(검, 창촉, 화살, 단검, 투구 등)은 1980년대 전투의 최종 위치가 확인된 이후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칼크리제 갑옷의 철제 부품 클로즈업. ©Museum and Park Kalkriese
2018년 금속 탐지기 신호가 감지된 흙 덩어리를 통째로 추출한 뒤, 연구진은 신중하게 스캔 분석을 실시했다. 이는 흙 속에 묻혀 있던 금속 유물이 공기와 접촉하며 산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바로 이 분석 과정에서 연구진은 퇴적층 속에 훌륭한 상태의 로마 갑옷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도 확인했다.
"이것은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로 알려진 형태입니다." 로마 군대 전문가 얀 르 보엑(Yann Le Bohec)이 프랑스 과학지
과거에는 이러한 흉갑의 작은 파편이 이베리아 반도, 브르타뉴, 다뉴브 지역에서 일부 수집된 적이 있을 뿐, 완전한 형태의 갑옷은 발견된 바 없었다.
"이러한 경첩식 또는 판갑 형태의 갑옷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도입되었습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사용되던 사슬 갑옷이나 비늘 흉갑을 개선한 것이었죠. 비늘 흉갑은 가죽 옷에 금속 '비늘'을 부착한 형태로, 기원전 17세기부터 군대에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실험실에서 정성껏 분리 중인 칼크리제의 로마 갑옷(1세기). ©Museum and Park Kalkriese
이 발견과 더불어 포박용구의 잔해도 함께 출토되었다. 죄수를 결박하는 데 쓰이던 일종의 수갑이 달린 철제 목걸이였다. "패배와 노예화라는 굴욕을 피하기 위해 많은 로마 병사들이 토이토부르크에서 자결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 중 일부는 도주를 시도했지만 모두 붙잡혔죠." 얀 르 보엑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 갑옷의 주인도 그중 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철판, 리벳, 고정 장치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분리하는 섬세한 작업이 현재도 진행 중이며, 2022년 독일 칼크리제 박물관 특별 전시회에서 이 귀중한 갑옷이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토이토부르크의 재앙

바루스의 군단과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부족 간의 토이토부르크 전투. 화가 오스카 안톤 코흐(Oscar Anton Koch) 작, 1909.
습지와 언덕 사이에 갇힌 상황에서 게르만 전사들이 끊임없이 물결처럼 달려 내려와 공격하자, 2만 5천 명의 로마 보병과 기병은 기원후 9년 독일 베스트팔렌 토이토부르크, 현재의 칼크리제 숲에서 산산조각 났다. 후에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n Cassius, 155~235)는 전방에서 벌어진 학살을 알지 못한 후위의 군단병들이 늑대의 입 속으로 계속 뛰어들었다고 기록했다. 재앙 앞에서 지휘관 바루스는 적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했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이 재앙, 즉 '바루스의 대참패(clades Variana)'와 연결되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포로로 잡힌 로마 장교들은 모두 게르만족이 그들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얀 르 보엑이 덧붙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저서 57권에서 서기 15년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만 원정 도중 전장을 다시 방문하여 "바루스와 함께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수습해 장례를 지내고 흔적을 덮었다"고 기록했다. 적에게 빼앗긴 제17·18·19군단의 독수리 군단기(아퀼라)의 상실은 로마에 있어 최대의 굴욕으로 여겨졌다.
새 원정군의 로마 군단병들은 이 자리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했다.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매장되지 못하는 일'을 잘 알던 아르미니우스는 수천 명의 패배한 병사들의 시신을 전장에 방치하거나,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거나 훼손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토이토부르크는 로마 역사 내내 저주받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