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의 시작점에 자리한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로어노크의 잃어버린 식민지'다. 1587년, 신대륙에 상륙한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 원주민 부족 속으로 몸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후반 로어노크 섬의 지도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가 로어노크 섬에서 모습을 감춘 지 435년이 지난 지금,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스터리가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일까? 2020년 1월 로어노크 섬 서쪽 80km 지점에서 새로운 발굴 조사를 진행한 비영리 단체 퍼스트 콜로니 재단(First Colony Foundation)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들이 원래 거점에서 사라진 후 현재의 버티 카운티(Bertie County) 일대에서 계속 생활했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두 개의 의문스러운 유적지
독립 고고학자 니컬러스 루케티(Nicholas Luccketti)가 이끄는 팀은 앨버말 만(Albemarle Bay)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 별칭 'Y 유적지'에서 영국·스페인·독일·프랑스산 도기 파편 다수를 발굴했다. 연구팀은 이것이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의 식민지 구성원 상당수가 1590년 이후, 즉 잉글랜드 왕국이 이 식민지를 소멸 처리한 해 이후에도 이곳에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판단한다.
2015년부터 2017년 사이에는 'Y 유적지'에서 약 3km 떨어진 헤터러스 섬(Hatteras Island)의 'X 유적지'에서도 검 칼자루, 깨진 그릇, 슬레이트 판 파편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영국 브리스틀 대학교의 고고학자 마크 호튼(Mark Horton)이 이끈 또 다른 팀의 발굴 성과였다. 호튼은 당시 이미 이 유물들이, 소멸한 영국 식민지 사람들이 재산을 챙긴 채 주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동화되었다는 가설을 크게 뒷받침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08년, 로어노크 원주민의 목걸이로 추정되는 유물 앞에 선 퍼스트 콜로니 재단 고고학자 닉 루케티, 데이비드 해저드, 루크 페코라로. 출처: First Colony Foundation
두 고고학 팀의 발견과 주장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대륙을 개척하기 위해' 북미 해안에 상륙한 이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들이 겪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먼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왕실에 버려진 110명의 개척자
1585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총신이자 항해가였던 월터 롤리 경은 대서양 건너편에 식민지를 세워, 이미 반세기 이상 대륙에 진출해 있던 스페인을 견제할 권한을 얻었다. 1587년, 세 척의 배가 이 땅을 향해 출항했으며, 이 지역은 여왕의 '처녀성'을 기리는 뜻에서 '버지니아(Virginia)'로 명명되었다. 배에는 런던 인근 출신 장인과 농부들을 중심으로 한 110명의 정착민이 탑승했으며, 여성 18명을 포함해 각자 200헥타르의 토지가 약속되었다.
롤리는 존 화이트(John White)에게 탐사대를 이끌고 식민지를 통치할 임무를 맡겼다. 화이트는 임신한 딸 엘레너를 함께 데려갔다. 그래야 딸의 아이가 아메리카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 시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87년 7월, 선박들은 폭풍이 잦은 험준한 섬 로어노크에 정박했다. 이곳은 지금도 '대서양의 묘지'라 불릴 만큼 거주 조건이 열악한 곳이었다. 단 한 달 뒤, 식량 부족에 직면한 화이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며칠 전 태어나 배 이름을 따 '버지니아'라 불리는 손녀와 딸을 뒤에 남겨두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잉글랜드가 스페인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그가 식민지로 돌아온 것은 무려 3년 후였다.
1590년 8월 18일 이른 아침, 귀환 허가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존 화이트는 마침내 로어노크에 다시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텅 빈 캠프였다. 마치 떠나기 전 정리라도 한 듯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흥미로운 단서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울타리 말뚝 바깥면에는 'Croatoan', 나무에는 'Cro'라는 글자가 각각 새겨져 있었다. '크로아토안(Croatoan)'—바로 헤터러스 섬과 그곳에 살던 원주민 부족의 옛 이름이었다.

1590년 로어노크에 도착한 구조대가 섬에서 발견한 것은 버려진 마을과 나무와 울타리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글자뿐이었다. 윌리엄 러드웰 셰퍼드 삽화, 윌리엄 제임스 린턴 판화(1876). 출처: Wikimedia Commons
3년간 홀로 방치된 이 남녀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확실한 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추측은 많았다. 작은 무리로 흩어져 주변 숲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죽었거나, 원주민 부족에게 학살당했거나, 아니면 스페인인들에게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는 이론 등이 제기되었다.
비밀에 부쳐진 새로운 유적?
그래서 다시 유럽산 도기 파편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 파편들은 소멸된 개척자들 중 적어도 일부가 생존하여 두 갈래로 나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니컬러스 루케티는 "발견된 유물의 수와 종류의 다양성은 이 유적지에 1587년에 사라진 월터 롤리 경의 식민지 구성원 여러 명이 거주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게다가 다른 단서들도 이 시나리오와 부합하는 듯하다.
화이트는 초기 저술 중 하나에서 개척자들이 캠프를 '내륙으로 50마일' 옮길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스스로도 이후 그들을 찾지 못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어져 왔다… 2012년까지는 말이다. 연구진이 화이트가 그린 지도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한 것이다. 동부 노스캐롤라이나를 묘사한 이 지도에는 앨버말 만 끝자락의 요새 그림 위에 기묘하게도 작은 종이 조각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잉크로 그려진 요새가 숨겨져 있었고, 그 위치는 정확히 로어노크 서쪽 80km 지점이었다.

존 화이트가 직접 그린 지도에 붙어 있던, 요새를 가린 작은 종이 조각이 빛에 비춰진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화이트가 자신이 알고 있던 어떤 장소의 위치를 일부러 숨긴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스페인인이 식민지의 새로운 위치를 알아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화이트는 어쩌면 그의 어린 손녀 버지니아를 품에 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회의적인 목소리
하지만 최근 이 부지, 즉 현재의 X 유적지에서 진행된 발굴에서 고고학자들은 요새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유명한 영국산 유물들만 확인되었을 뿐이다. 로어노크 수수께끼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이스트캐롤라이나 대학교의 인류학자 찰스 이웬(Charles Ewen)은 관련 저서를 곧 출간할 예정인데, 그는 이 단서들이 너무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해석은 전적으로 소수의 유물에만 근거하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인정하듯 이 유물들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속합니다. 이 물건들이 원주민 거주지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을 다른 경로도 충분히 있습니다. 예컨대 교역 같은 것이지요. 초기 유럽인 거주를 훨씬 확실하게 입증해줄 건축 유적이나 무덤 유구는 아직 이 유적지에서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발견된 파편이 속하는 종류의 도기, 즉 보더(Border) 유물, 발러스터 항아리(baluster jar), 노스데번(North Devon) 도기 파편은 로어노크 이전의 잃어버린 식민지가 아닌, 미국 역사상 최초의 영구 영국 정착지로 여겨지는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유행이 지나 제임스타운에서는 소량으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지만, 이웬은 "17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도기만으로는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특히 로어노크 지역에는 유럽인과 접촉했던 큰 원주민 마을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직 열려 있는 많은 가능성
반면 니컬러스 루케티는 이 유럽산 유물들이 17세기 초 이 지역에 기록된 유일한 유럽인 상인이었던 너새니얼 배츠(Nathaniel Batts)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변에 다른 유럽인은 없었고, 제임스타운의 유물이 그토록 서쪽 멀리까지 운반되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의 팀은 또한 존 화이트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개척자들에게 헤터러스 섬과 그 주변이 논리적인 피난처였다고 강조한다. 그곳 원주민들이 영국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또 다른 이론들도 내놓고 있다. 그중 하나는 개척자들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떠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찰스 이웬은 "실제로 역사적·고고학적 데이터가 이렇게 부족하면, 서로 똑같이 그럴듯한 수많은 시나리오를 도출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발견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알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