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북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우뚝 솟았던 원뿔형 언덕 '흰 기념비(White Monument)'는 석고로 덮여 있어 멀리서도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기원전 3천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무덤에는 전사한 병사들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강력한 국가의 지배력을 과시하는 상징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이 유적은 티슈린 댐 건설로 물 아래 잠겨 있지만, 댐 건설 이전에 진행된 구조 발굴 조사를 통해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바로 이 기념비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쟁 기념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직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공동묘지
유프라테스 중류 좌안, 바나트/바지(Banat/Bazi) 복합 유적에서 북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는 높이 22미터, 지름 100미터의 작은 원뿔형 언덕이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텔 바나트 노스(Tell Banat North)'라고 명명했습니다. 티슈린 댐 건설로 강 계곡이 잠기기 전인 1988년부터 1999년까지, 유프라테스 구조 발굴 프로젝트의 토머스 매클렐런(Thomas McClellan)과 토론토 대학의 앤 포터(Anne Porter)가 이곳에서 발굴을 진행했습니다. 최근 학술지 Antiquity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석고와 마르층으로 덮여 햇빛에 반짝였다고 해서 '흰 기념비'라 불리는 이 언덕은 적어도 세 단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수직 공동묘지'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구물리학적 탐사 결과에 따르면, 유적의 첫 번째 단계는 무덤 위에 흙을 쌓아 올린 언덕으로,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첫 번째 마운드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댐 건설 전에 이 부분을 발굴하거나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축조 단계(기원전 2700/2600~2450년)에는 언덕에 첫 석고 코팅이 이루어졌고, 그 위로 돌과 흙으로 만든 일련의 분구가 겹겹이 쌓였습니다. 발굴이 가능했던 네 개의 분구에서 고고학자들은 여러 사람(무덤당 2~5명)의 파편화되고 해체된 유해와 함께 동물 뼈, 도자기, 그리고 양추형 흙공을 발견했습니다. 이 분구들은 다시 새로운 백색 석고층으로 통일되었고, 표면은 띠 모양으로 두들겨 물결 무늬 효과를 냈습니다.
뼈가 박힌 계단식 피라미드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기원전 2450~2300년 사이에 이루어진 '흰 기념비'의 마지막 축조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이전 언덕을 그대로 높이 쌓아 올리는 기존 방식과 달리, 외관과 매장 방식 모두에서 앞선 단계들과 확연히 차이를 보입니다. 이 시기에는 언덕이 수평으로 확장되었는데, 높이 약 50센티미터, 폭 1미터씩의 단을 이루며 쌓아 올려졌습니다. 연구자들은 '흰 기념비'가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였고, 아마도 석고로 덮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후 침식으로 가장자리가 무뎌지면서 사진에서 확인되는 능선 있는 돔 형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각 층의 옹벽에 인골(주로 사람 뼈)이 직접 깔려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데, 고고학자들은 이 뼈들이 배열된 순서와 공간적 패턴을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전사(戰士)들의 군대
18개 뼈 퇴적층에 대한 분석 결과, 인골만으로 구성된 퇴적물과 동물 뼈가 포함된 퇴적물이 구분되는 반복적인 구조가 드러났습니다. 언덕 북서쪽의 뼈 퇴적물은 거의 예외 없이 젊은 성인 한 명과 청소년 한 명으로 이루어진 남성 둘의 조합이며, 말과(馬科) 동물의 유해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반면 남서쪽의 퇴적물에는 주로 한 사람의 뼈가 있고, 그 주위에 반지, 덮개 달린 수레 모형, 특히 양추형 흙공 등 다양한 유물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기념비에 안치된 뼈들이 한 군대의 병사들이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한쪽은 전차 승무원, 다른 쪽은 보병입니다.
전차 부대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유명한 '우르의 깃발(Standard of Ur)'의 '전쟁의 면'에서 볼 수 있듯이, 수메르 군대의 네 바퀴 전투 전차는 말과 동물이 끌었고 두 명의 병사가 탑승했습니다. 한 명은 뒷바퀴 축 위에 서서 고삐를 쥐었고, 다른 한 명은 차량 뒤쪽 단에 앉아 균형추 역할을 하며 전차가 기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텔 바나트에서 발견된 청소년들은 전투 전차에서 곡예처럼 움직이며 '점퍼(jumper)' 역할을 한 기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쿵가(kunga)라 불리는 귀한 말과 동물과 함께 구입되었을 것입니다. 당나귀와 온거(onager, 야생당나귀)의 교잡종으로 추정되는 쿵가는 매우 귀중하게 여겨진 동물로, 주로 수레를 끌었습니다. 텔 바나트 퇴적물에서 발견된 말과 동물 유해는 너무 파편화되어 확실한 종 판별은 어려웠지만, 완전한 형태의 관절골 하나가 인근 움 엘 마라(Umm el-Marra) 유적에서 확인된 쿵가 뼈와 일치했습니다.
흙 알갱이로 무장한 보병
양추형 흙공은 고고학자들이 해석을 시도한 또 다른 특징적인 유물입니다. 기원전 3천년기 이 지역 어떤 무덤에서도 이것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시리아 북부의 다른 유적들에서는 발견되었습니다. 쿵가를 사육하던 나갈(Nagar) 궁전 안뜰 뒤편의 텔 브락(Tell Brak), 그리고 요새화된 도시 공격에 사용된 하무카르(Hamoukar) 유적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투석구로 발사할 수 있는 투사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흰 기념비' 남서쪽 구역에 묻힌 이들은 투석구로 무장하고 적에게 치명적인 탄막을 퍼부었던 보병이었을 것입니다.
과시하는 권력의 상징
연구자들은 텔 바나트 노스의 언덕이 "근동 지역의 다른 어떤 장송 맥락과도 유사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강한 상징적 가치를 지닌 이 기념비의 의미와 기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곳에 안치된 전사들은 패배한 적인가, 아니면 영광스럽게 기려진 아군인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비문에 나오는 분묘 언덕 묘사에 주목했습니다. 이 묘사들은 적의 시신 더미를 그리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처벌과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실제 고고학적 사례는 발견된 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텔 바나트의 뼈 배치는 이러한 무질서한 시신 더미를 재현하지 않습니다.
고고학자들에게 분명한 것은, 텔 바나트 노스의 뼈들이 2차 매장으로서 다른 원래 장소, 즉 전장이나 묘지에서 온 것이며, "죽음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신중하게 선별되고, 배열되고, 마침내 기념물화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상징적 가치만이 아니라 경고의 기능까지 지닌 연출이었습니다. 건축물의 높이, 그리고 반짝임으로 인한 가시성은 '흰 기념비'가 단지 현지 주민만이 아니라 강 계곡, 초원, 그리고 그 너머의 모든 주민들을 향한 것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소집할 수 있고, 승리를 위해 싸운 그들을 시간을 초월하여 기릴 줄 아는 강력한 국가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