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크니틀링엔(Knittlingen)에 위치한 메로빙거 왕조 시대 공동묘지에서 목이 잘린 채 매장된 말이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극적인 존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고고학자들은 이 말이 주인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말의 주인은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유력자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크니틀링엔 메로빙거 묘지에서 발견된 목 없는 말의 매장 모습
초기 중세 시대의 110여 기 무덤
크니틀링엔이라는 지명 자체가 중세부터 마을이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지명학적으로 이름 끝이 '-ingen'과 '-heim'으로 끝나는 지역은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도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100년경 'Cnudelingen'이라는 형태로 등장합니다. 1920년에는 완공되지 못한 철도 건설 공사 중 현 도심 서쪽에서 중요한 매장 유적이 발견되었고, 1984년에는 대규모 주거단지 조성을 앞두고 실시한 사전 조사에서 북부 지역에 무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021년 8월부터 새로운 도시 개발 계획에 따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문화재청 고고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재개하면서 새로운 성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봄까지 진행될 예정인 이번 발굴 조사에서는 이미 초기 중세 시대, 정확히는 6~7세기의 무덤 110기 이상이 확인되고 목록화되었습니다. 이 무덤들은 열을 지어 비교적 일정하게 배치된 형식입니다. 다만 일부 무덤은 열 밖의 원형 분구 안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그곳에 잠든 이들이 엘리트 계층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메로빙거 왕조의 장례 풍습
6세기에서 9세기 사이 초기 중세 시대, 크니틀링엔 지역은 프랑크족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는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 대부분, 그리고 독일·스위스·네덜란드 일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무덤들은 당시 특유의 장례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메로빙거 시대의 관습처럼, 이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시신들은 단순히 땅속에 묻히기도 하고 장례용 묘실에 안치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묘실의 골격 구조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일부 시신은 나무 관에 안치되어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옷을 입은 채로 매장된 고인들
또 하나의 특징적인 풍습은 고인들이 전통 의복을 입은 채 매장되었다는 점입니다. 초기 중세 시대부터 이루어진 도굴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자들은 성별에 따라 구분되는 의복 관련 유물들을 다수 발견했습니다. 여성과 소녀들의 무덤에서는 진주 목걸이, 귀걸이, 팔찌, 옷을 고정하기 위한 브로치, 장식 원판이 달린 허리띠 펜던트 같은 보석류가 출토되었습니다. 빗이나 칼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던 물건들도 있었고, 일부는 부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 무덤에서는 무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스파타(spatha, 메로빙거 시대의 넓은 칼날 검), 창, 방패, 화살촉과 함께 이를 차기 위한 허리띠가 동반되었죠. 모든 무덤에는 도자기 용기도 함께 매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인이 저 세상으로 떠나는 길에 곁들인 음식 공물을 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용기 안에서는 동물 뼈와 달걀 껍질이 발견되었습니다.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장식 원판 © Landesamt für Denkmalpflege im Regierungspräsidium Stuttgart / A. Furan
유행을 선도하던 여인들
과거 도굴로 많은 유물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덤들은 고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특히 6세기 후반에 매장된 한 여성의 경우 거의 완전한 형태의 피블라(fibulae, 장식용 옷핀) 한 벌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주 고고학자 폴케 다밍거(Folke Damminger)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것이 당시의 전형적인 관습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고인은 황금 원판 피블라 하나만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미 다음 세기의 유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7세기 초 여성 무덤에서 출토된 필그리 장식의 금판 피블라, 지름 3.6cm © Landesamt für Denkmalpflege im Regierungspräsidium Stuttgart / A. Furan
기수와 머리 없는 말
고고학자들은 일부 남성들이 전사, 더 구체적으로는 기병이었다는 점까지는 파악할 수 있지만,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목 없는 말의 존재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습니다. 이 무덤이 '열 밖'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자들은 이 말이 주인, 아마도 토지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를 구현하고 보여주는 존재라고 해석합니다. 기병의 무덤에 쌓아 올린 부장품들처럼, 이 말 역시 주인과 그 후손들의 지위를 증명하고 영원히 이어가기 위한 장례 공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행위는 분명 장례 의식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궁정 문화를 따른 지역 엘리트
부장품들은 이 공동묘지에 묻힌 이들이 엘리트 계층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청동잔의 존재는 그들이 식탁 문화에서 궁정의 관습을 따랐음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의 인상은 7세기 말에 만들어진 무덤들에서 점차 희미해집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들에서 더 검소한 공물이 발견된다고 지적합니다. 지역 엘리트가 더 이상 예전만큼 번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매장 의식 자체가 더 간소한 형태로 변화했기 때문일까요?
639년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Dagobert I)가 사망하면서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왕국의 고위 관료인 궁재들이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중 한 명인 피핀 3세(소 피핀)가 751년 권력을 장악하면서 메로빙거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 아래 기독교가 농촌 지역까지 확산되면서 장례 관습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옷을 입혀 매장하는 관습과 무덤에 공물을 넣는 풍습은 점차 사라지다가, 결국 이교도적 관습으로 규정되어 금지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