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로버트 코흐: 병원체 사냥꾼, 세균의 제왕 – 미생물학의 혁명가

병원체 사냥꾼, 세균의 제왕: 로버트 코흐에게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른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였지만 그는 거듭된 실패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의학의 여러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다.

글: 디르크 쾨네

코흐, 의학에 혁명을 일으키다

1882년 3월 24일 베를린, 생리학회 회의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의학적 센세이션을 목격하고 있는지 직감했다. 의사 로버트 코흐가 결핵균을 분리해냈음을 발표한 순간이었다. 당시 독일인 7명 중 1명이 폐결핵으로 사망하던 시절, '폐병'은 불치병이거나 경미한 경우라도 평생 요양원 신세를 면치 못하는 병이었다. 결핵균의 발견은 백신 개발의 길을 열었고, 코흐는 호흡기 분비물에서 결핵균을 찾아내 공기가 감염 매개체임을 입증했다. 이는 개방성 폐결핵 환자가 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다. 매년 3월 24일로 지정된 '세계 결핵의 날'은 바로 코흐의 이 발견을 기리는 것이다.

탄저병 병원체 추적

1843년 말 클라우슈탈에서 태어난 로버트 코흐가 유년기를 보낼 때만 해도, 과학자들은 역병과 전염병의 원인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독성 증기인 '미아즈마'라고 믿었다. 수년 후 코흐는 페스트, 결핵, 콜레라 같은 질병이 미세한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의학사에 획을 그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2년 함부르크 콜레라 유행 당시 그는 방역 조치를 진두지휘했으며, 탄저균과 결핵균을 발견하고 세균 배양법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는 전염병 억제와 수세기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질병 퇴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05년, 로버트 코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쥐를 이용한 패혈증 연구

독일어권에서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인식을 정착시킨 이는 코흐였다. 특히 시민 계층은 '위생적으로 깨끗한' 생활방식에 익숙해졌다.

젊은 병원 의사 시절부터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코흐는 보불전쟁 중 부상이 경미한 병사들이 탄저병으로 사망하는 사례를 접하고 원인 규명에 몰두했다. 그는 '행잉 드롭 기법(hanging drop technique)'을 고안해 슬라이드 글라스 아래 매달린 방울 속에서 미생물을 배양함으로써 현미경으로 감염 동물의 혈액 속 세균을 관찰하고 검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특정 목초지에서 소가 반복적으로 탄저에 감염되는 이유가 죽은 가축의 사체를 충분히 깊게 매장하지 않은 농부들의 관행 때문임을 밝혀냈고, 감염된 양의 말린 혈액이 4년이 지나도 전염력을 유지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기술 발전에 힘입은 코흐의 연구

코흐의 연구를 지탱한 것은 단순하게 갖춰진 실험실에서도 철저한 방법론과 논리적인 증거 연쇄였다.

1876년 탄저병 병원체 논문 발표 후, 코흐는 상처 감염(패혈증)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패혈증 동물 모델을 확립하고, 동물 종마다 서로 다른 세균 유형에 다르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컨대 쥐에서 서로 다른 6종의 세균에 의해 유발되는 6가지 형태의 패혈증을 식별해냈다. 1878년에는 『상처 감염병의 병인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콜레라균 발견을 위한 원정

코흐는 끊임없이 당대의 기술적 진보를 연구에 접목하려 애썼다. 현미경 기술을 최적화하고 미생물의 사진을 최초로 촬영했다.

  •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
  • 로베르트 코흐 재단
  • Nobelprize.org

베를린 제국보건국에서 근무하며 그는 이른바 '평판 배양법'을 개발했다. 그동안 세균은 고기 국물이나 감자 조각에서 배양되었으나, 고기 국물은 현미경 고정이 어렵고 많은 병원성 세균은 감자에서 자라지 않았다. 코흐는 고기 국물을 젤라틴으로 고체화해 직사각형 '평판 접시'에 부어 넣었고, 이 고체 투명 배지법은 이후 모든 세균학 연구의 표준이 되었다.

투베르쿨린: 코흐의 백신, 효과 입증 실패

로베르트 코흐는 흔히 콜레라 병원체 발견자로 인용되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의 필리포 파치니가 1854년에 이미 이 균을 분리한 바 있다.

소년 시절 알렉산더 폰 훔볼트 같은 박물학자를 꿈꾸던 코흐는 10명의 형제자매 중 일부가 우루과이, 멕시코, 미국으로 이민 간 가정에서 자랐다. 1883년 독일 콜레라 원정대 지휘 제안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향했으나, 이집트에서 유행이 이미 수그러들어 원정대는 11월 인도로 이동했다. 두 달 뒤 코흐는 콜레라균 검출에 성공했고, 수인성 전파 경로도 밝혀냈다. 1884년 5월 귀국길은 개선 행진과도 같았다. 빌헬름 1세 황제가 코흐를 접견하고 10만 마르크를 하사했다.

이듬해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은 코흐를 교수이자 신설 위생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교단에 서는 데 소질이 없었다. 강의와 시험은 그에게 고역이었고, 건강도 악화되어 여러 차례 장기 여행을 떠나야 했다. 결혼 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한편 파리의 라이벌 루이 파스퇴르 연구팀은 예방 백신 개발에 괄목할 진전을 보였고, 1890년까지 코흐의 이렇다 할 새로운 보고는 없었다.

감염병 연구소 소장 취임

1890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제10차 국제의학회의에서 코흐는 결핵균을 종식시킬 백신 '투베르쿨린'을 발표했다. 수천 명의 결핵 환자들이 이 약으로 완치되기를 고대했다. 열광은 컸으나, 혈청은 코흐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장기적 치유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피험자가 사망했다. 죽은 결핵균 성분을 혼합한 투베르쿨린은 치료제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결핵 진단 도구로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가짜 백신이라는 오명은 코흐에게 큰 타격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약효를 확신했고 7년 뒤 수정된 투베르쿨린을 내놓았으나 역시 치료 효과는 없었다.

남아프리카와 뉴기니에서의 활약

1891년 코흐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7월 1일, 그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프로이센 왕립 감염병 연구소(실험부·임상부)'의 소장이 되었다. '코흐 연구소'는 도시와 국가 당국의 위탁 업무를 수행했다. 9년 뒤 직원과 연구 과제 증가로 연구소를 베를린-베딩 북안의 신축 건물로 이전했는데, 코흐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이 기관은 오늘날까지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892년 8월 함부르크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코흐의 전문성이 방역에 투입됐다. 함부르크 의사들과 달리 코흐는 콜레라균 검출을 위한 세균학적 방법에 정통했다. 시민들에게 식수 끓이기 경보가 내려지고, 감염자 가정에 소독반이 투입됐다. 10월 유행이 진정될 때까지 8,6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유행 이후 함부르크에는 새로운 소각장과 여과 시설이 가동되었고, 의사들을 위한 연수 과정이 마련되었으며, 코흐의 제자 베른하르트 노흐트가 항만 검역관으로 임명되었다.

말라리아 원정대, 뉴기니로

1884년 인도에서 발발한 콜레라가 툴롱을 거쳐 유럽에 상륙한 뒤, 1896년 영국 정부는 남아프리카 소역(牛疫) 방역을 위해 코흐를 초청했다. 그는 둘째 부인 헤트비히와 킴벌리로 건너가 환축의 혈액이 극도로 전염성이 강함을 입증했으나, 병원체는 바이러스였기에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효과가 있는 듯한 혈청을 개발했다. 이듬해 3월 독일 정부는 페스트가 발생한 인도로 코흐를 파견했다. 페스트로 선박 운항이 중단되어 항해가 험난했으나, 이미 페스트균은 알려진 상태였다. 코흐는 중요한 관찰을 남겼다: '대량의 쥐 떼죽음이 페스트 대유행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장티푸스 캠페인과 강제 격리

1897년 7월 로베르트와 헤트비히 코흐는 다시 아프리카로 향했고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체류하며 거의 1년간 페스트, 말라리아, 소질병을 연구했다. 1898년 5월 베를린으로 귀환했다. 말라리아는 독일에서도 발생했다.

독일 식민제국에서 '열대열(말라리아)'이 가장 큰 문제였던 곳은 독일령 뉴기니의 카이저 빌헬름스 란트였다. 이에 외무부 식민국이 코흐를 파견했고, 원정대는 1900년 말 인도양의 섬에 도착했다. 뉴기니 원주민들을 연속 검진한 결과, 코흐는 그들의 혈액에서 말라리아 원충을 검출했음에도 이들이 가벼운 증상만 보이거나 발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반면 독일 이주민이나 중국인 계약 노동자들은 즉시 발병했다. 오랫동안 그 지역에 거주할수록 기생충에 대한 저항력이 생긴다는, 즉 '후천적 말라리아 면역' 현상을 최초로 입증한 순간이었다.

결핵균 발견으로 노벨상 수상

코흐의 뉴기니 말라리아 방역 조치가 식민 행정부에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그는 1901년 독일 국내에서 산발적으로 발병한 발진티푸스(장티푸스) 퇴치로 방향을 돌렸다. 코흐는 프로이센 군대를 동원해 트리어 인근에서 장티푸스 캠페인을 개시했다. 교사와 성직자를 면담하고 학교 결석 명부와 지역 건강보험 데이터를 분석해 감염 의심자를 추적했다. 이들은 세균학적 검사를 받았고, 환자와 무증상 감염자는 격리되었다. 1903년부터 캠페인은 독일 남서부로 확대되어 총 11개 검사소가 설치되었고, 의료진은 수십만 명을 검사해 수천 명의 의심자를 때로 강제로 격리했다.

결핵 퇴치를 위한 로베르트 코흐 재단 설립

1904년 코흐는 자진해서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다시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향해 수면병이 창궐한 지역을 조사했다.

빅토리아 호수 세세 제도에서는 인구 3분의 2에 해당하는 2만 명이 수면병으로 사망했다. 코흐는 환자들에게 비소 제제 아톡실(Atoxyl)을 주사했으나, 통증·현기증·구토·산통 등 부작용이 심했고 일부는 실명하기까지 했다. 많은 환자가 치료를 피해 도망쳤고, 코흐는 오염 지역에서 연속 검진을 실시하고 환자를 '수용소'에 격리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1,200개 이상의 수면병 진료소가 세워졌으나 치료 성과는 없었다.

노벨상 후보 지명 소식을 접한 코흐는 체류를 중단하고 스웨덴으로 향했다. 1905년 말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로베르트 코흐: 최고의 연구자 이력서

  • 1843년: 12월 11일, 광업청장 헤르만 코흐와 부인 마틸데 사이에서 11남매 중 하나로 클라우슈탈(고슬라르)에서 출생.
  • 1848년: 4세에 독학으로 읽고 쓰기를 터득, 가정교사로부터 수업 받음.
  • 1851년: 클라우슈탈 인문계 김나지움 입학, 1862년 졸업.
  • 1862년: 괴팅겐 대학에서 문리학 수학, 1학기 만에 의학으로 전과.
  • 1866년: 국가시험 합격 및 박사학위 취득.
  • 1867년: 5월 목사 딸 에미 프라츠와 결혼, 이듬해 딸 게르트루트 출생.
  • 1868년: 함부르크, 랑엔하겐, 니엠크, 라크비츠 등지에서 의사로 근무.
  • 1871년: 보불전쟁 자원입대, 야전병원에서 장티푸스·이질 환자 진료.
  • 1872년: 물리학 시험 합격, 볼슈타인(포젠 주) 군의관 부임.
  • 1876년: 탄저병 연구 중 최초로 특정 병원체 규명. 『탄저균의 발생사를 통한 탄저병의 병인』 발표.
  • 1880년: 베를린 제국보건국 임명.
  • 1882년: 결핵균 증명, 베를린 생리학회에서 『결핵의 병인』 강연으로 발표.
  • 1885년: 베를린 대학 교수 및 감염병 연구소장 취임.
  • 1890년: 베를린 국제의학회의에서 결핵 치료제 '투베르쿨린 1890' 발표.
  • 1891년: 교수직 사임, 프로이센 감염병 연구소장(현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 취임.
  • 1893년: 부인과 이혼, 같은 해 17세 헤트비히 프라이베르크와 재혼.
  • 1896~1906년: 열대 지역 다수 원정, 페스트·말라리아·수면병·소역 기원과 전파 경로 연구.
  • 1905년: 세세 제도 체류 중 노벨상 수상차 스웨덴행.
  • 1907년: 로베르트 코흐 재단 설립.
  • 1910년: 5월 27일 바덴바덴에서 심장마비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