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니클라스 루만: 첼트카스텐을 든 남자, 사회 이론의 거장

20세기 독일 사회학을 대표하는 이론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법학을 공부한 뒤 사회학으로 전향하여, 모든 사회 영역을 아우르는 방대한 '사회 체계 이론'을 완성한 인물이다.

글: 지모네 라스텔리(Simone Rastelli), NDR.de

뤼네부르크의 어린 시절

루만은 1927년 12월 8일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양조장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항구 지역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스위스 호텔리에의 딸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던 그는 1937년 요하네움 고등학교(Johanneum)에 입학했고, 한 학년을 건너뛸 만큼 뛰어난 재능으로 교사와 동급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부지런함과 독서에 대한 열정, 그리고 또렷한 정치적 견해가 그를 두드러지게 만든 두 가지 요소였다. 여름방학 때마다 스위스를 찾았던 덕분에 제3제국 독일에서는 기피되던 견해들과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나치 정권과의 애매한 관계

그럼에도 루만은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하게 된다. 훗날 언론인 볼프강 하겐(Wolfgang Hage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행진과 인사 의식이 불쾌했고, 정권의 과시적인 자기 연출은 역겨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회철학자 디틀레프 호르스터(Detlef Horster)와의 대화에서는 아버지의 정치 성향을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이라고 묘사했다. 사회민주당도 국가사회주의도 반대하는 아버지의 입장은 가족에게 잦은 곤란을 안겼고, 새로운 세법 때문에 양조장 사업을 이어가기 어려워지면서 루만 가의 경제 형편은 나치 집권과 함께 악화되었다.

루만이 열두 살이 되던 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열일곱 살에는 공군 보조병으로 징집되었고, 그때 이미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승패보다 그와 친구들을 더 괴롭힌 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권력에 남느냐는 문제였다. "공부하려면 당원이 되어야 했으니까요"라고 그는 1977년에 말했다. 루만이 실제 NSDAP(나치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은 2007년 슈피겔(Spiegel) 기사를 통해서야 알려졌으며, 본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첼트카스텐: 잃어버리는 생각은 없다

루만은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았다. 1945년 9월 석방된 지 일 년 뒤 프라이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 결정적 계기는 전쟁의 참상과 포로 생활에서 겪은 학대가 낳은 직접적인 결과물, 즉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1950년대 초, 루만은 자신의 이름을 남긴 유명한 카드 상자, 이른바 첼트카스텐(Zettelkasten) 만들기에 착수한다. 중요한 생각 하나하나를 작은 카드에 적어 옮기면서 수십 년에 걸쳐 독특한 번호와 참조 시스템을 발전시켰고, 이를 통해 노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정리했다. 이 지식 관리 시스템은 오늘날에도 생산성 도구의 원형으로 널리 회자되며, '잃어버리는 생각은 없다'는 그의 신념을 상징한다.

행정관에서 사회학자로

루만은 1962년까지 행정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뤼네부르크 상급행정법원과 니더작센 문교부 등에서 근무했다. 1960년 우르술라 폰 발터(Ursula von Walter)와 결혼한 뒤 휴직하고 하버드대학교 연수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사회학자 탤컷 패슨스(Talcott Parsons)와 그의 구조기능주의 체계이론을 접하게 되는데, 이 만남이 그의 학문적 운명을 바꾼다. 이후 루만은 패슨스의 이론을 사회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초월이론, 이른바 '거대이론'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평생 과제로 삼는다.

1961년 독일로 돌아온 루만은 슈파이어 독일행정대학의 컨설턴트로 활동했고, 1968년까지 도르트문트 사회연구소 부장을 맡았다. 같은 시기 뮌스터에서 헬무트 셸스키(Helmut Schelsky)와 디터 클래센스(Dieter Claessens)의 지도 아래 단 한 학기 만에 박사학위와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을 모두 마쳤다. 법학에서 사회학으로 전향한 이유에 대해 그는 1996년 이렇게 설명했다. "학창 시절에도 늘 해야 할 것만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도 로마법을 사회학적 배경으로 공부해서 그리스 매매법과 로마법을 비교하고 그 사회적 차이를 도출했습니다."

1968년 루만은 신설 개혁대학인 빌레펠트대학교 교수직에 임용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사회의 사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69년에 설립된 사회학부에 입사했을 때 진행 중인 연구 과제를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 프로젝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 이론'입니다. 기간: 30년. 비용: 없음."

1960년대 말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테오도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강의를 대신 맡기도 했으며, 그곳에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즉 평생의 최대 비판자를 만나게 된다.

1977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루만은 외르링하우젠(Oerlinghausen)의 시골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갔다. 아이들과 함께 그들의 '청소년 문화'를 온전히 즐기고, 개를 산책시키며, 읽고 쓰는 일에 몰두했다. 지식에 대한 갈증과 창작 욕구는 넘쳤지만, 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다.

'몰래 숨긴 엉터리'가 섞인 거대이론

학생들은 루만 특유의 숨겨진, 그리고 대개 무심코 흘려놓는 유머를 즐겼다. 유전공학 논쟁과 관련해 한스 마르틴 크루키스(Hans-Martin Kruckis)는 이런 발상을 예로 든다. "반딧불이의 유전 형질을 지닌 사과를 교배해 밤에도 딸 수 있게 하자는 제안." 1992년 저서 『대학이라는 환경(Universität als Milieu)』에서 루만은 자신의 모든 책에 '비밀스러운 엉터리 몇 가지'를 숨겨두었다고 고백한다. "성찰을 촉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건 제 본성이기도 하죠."

체계이론: 대표작 『사회적 체계』

1984년 루만은 『사회적 체계(Soziale Systeme)』를 출간했다. 6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많은 이들에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작자 본인에게는 약속했던 '사회의 거대이론'에 불과한 서문에 가까웠다. 이후 체계이론은 경제, 과학, 법, 예술, 대중매체, 정치, 종교, 교육 등 개별 사회 영역에 대한 저술로 이어졌고, 그중 일부는 사후에 출간되었다. 1997년의 『사회의 사회(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가 이 기획의 대미를 장식했다. 루만은 평생 다양한 주제에 걸쳐 약 450편의 논문과 7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62세에 슈투트가르트시로부터 헤겔상을 받았고, 빌레펠트에서 은퇴한 뒤인 1997년에는 사회학·사회과학 분야의 유럽 아말피상(Premio Amalfi)을 수상했다. 70세의 나이로 1998년 11월 6일, 니클라스 루만은 외르링하우젠에서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