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나라의 서태후 자희(慈禧太后, 1835~1908)는 처음에는 황제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지만, 1861년부터 1908년까지 거의 반세기에 걸쳐 제국의 실권을 직접 쥐고 있었던 인물이다.
함풍제의 총애를 받은 후궁
만주팔기(八旗) 출신 관리 혜정(惠徵)의 딸로 태어난 자희는 1835년 겨울 베이징에서 탄생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숙부의 손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 1851년, 15세의 그녀는 약 60여 명의 소녀들과 함께 황제 함풍제(咸豊帝)의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1852년에는 함풍제의 또 다른 후궁인 자안(慈安)이 정식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다. 1854년 함풍제는 자희를 가장 총애하는 후궁으로 삼았고, 1856년 4월 27일 자희는 아들 재순(載淳)을 낳으며 황후 다음가는 지위에 올랐다. 황자의 교육은 자안과 궁내 내시들에게 맡겨졌고, 자희는 황제의 국사 고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후궁과 달리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녀는 함풍제의 정무를 보좌했고, 이 과정에서 국정 운영의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자 조정은 만주의 열하(熱河)로 피신했다. 함풍제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주류와 아편에 의지하다가 1861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여섯 살의 재순이 동치제(同治帝)로 즉위했고, 자안과 자희는 함께 황태후의 지위에 올랐다.
‘수렴청정’으로 제국을 통치하다
성품이 온화했던 자안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을 택했고, 자희가 단독으로 전권을 행사했다. 심지어 아들이 친정(親政) 연령에 이른 뒤에도 그녀는 계속 실권을 놓지 않았다. 겉으로는 동치제가 결정을 내리고 조서를 반포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자희가 ‘막후에서 제국을 다스리는’ 수렴청정(垂簾聽政)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능했던 동치제는 1874년 병으로 사망했는데, 매독이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황후는 임신 중이었고, 자희는 황후가 아들을 낳으면 자신의 권력 기반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그녀는 제국의 고위 신료들을 급히 불러 모아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세 살배기였던 재탄(載湉)을 황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아이는 광서제(光緒帝)로 즉위했고, 자희는 계속해서 권력을 행사했다. 동치제와 마찬가지로 광서제 역시 성장한 뒤에도 강력한 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98년, 열강의 압박으로 점점 쇠퇴해가던 제국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광서제는 정치·경제·교육 등 전 분야에 걸친 개혁 운동인 무술변법(戊戌變法, 백일개혁)을 단행했다. 조카의 자립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자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녀는 황제가 통치 능력이 없다고 공표하고 그를 궁궐 안에 유폐한 뒤,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세력과 손잡았다. 1900년에는 의화단 진압을 위해 파견된 팔국연합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 미국)이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자 자희는 시안으로 피신해야 했다.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는 비소(砒素)에 의한 독살로 사망했는데, 배후에 자희가 있었다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다. 그보다 하루 전인 11월 13일, 자희는 순친왕(醇親王)의 아들 푸이(溥儀)를 새 황제로 임명해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녀 역시 독살당한 것으로 보이는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청나라를 지배했던 강력한 여인의 인생은, 그녀가 집어올린 마지막 황제와 함께 저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