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프루던스 크랜달(Prudence Crandall), 흑인 소녀들의 교육권을 위해 싸운 개척자

프루던스 크랜달(Prudence Crandall, 1803~1890)은 노예제 폐지 이전의 코네티컷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짧은 기간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학교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거듭되면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캔터베리 여자 기숙학교의 설립

프루던스 크랜달은 1803년 9월 3일 미국 동부 해안에 위치한 로드아일랜드주 홉킨턴에서 태어났습니다. 퀘이커 신앙을 가진 농부 부부인 에스더(Esther)와 파든 크랜달(Pardon Crandall) 사이의 딸로, 뉴잉글랜드 프렌즈 기숙학교(New England Friends' Boarding School)에서 산술, 라틴어, 과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크랜달의 부모는 이후 코네티컷주 캔터베리로 이주했습니다. 프루던스는 학업을 마친 뒤 교사가 되어 캔터베리의 한 여학교에서 첫 직장을 얻었습니다. 1831년에는 자매 알미라(Almira)와 함께 캔터베리 여자 기숙학교(Canterbury Female Boarding School)를 열었는데, 이곳은 처음에는 부유한 가정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립 기숙학교였습니다. 교육 과정은 매우 엄격했고 좋은 남학교에 필적하는 수준의 교육을 제공했기 때문에 이 학교는 곧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사라 해리스(Sarah Harris)의 등장

1832년, 자유 신분 아프리카계 미국인 농부의 딸인 20세 흑인 여성 사라 해리스가 학교 입학을 지원했습니다. 프루던스 크랜달은 폐지론 신문 디 리버레이터(The Liberator)에 보낸 편지에서 이 젊은 여성의 방문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품위 있는 한 검은 소녀—종교인이자 존경스러운 부모의 딸—가 지난 9월 어느 날 저를 찾아와 이렇게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크랜달 선생님, 저는 좀 더 배우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흑인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요. 제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신다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선생님께 해가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굳이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프루던스는 그녀의 입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마을 유력 인사들은 분노했고, 사라를 퇴학시키기 위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프루던스는 굳건히 버텼습니다. 결국 학생들의 가족들은 항의의 표시로 딸들을 학교에서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크랜달 양의 유색 인종 소녀 학교』

프루던스 크랜달은 굴복하는 대신 오히려 학교를 흑인 학생들만을 위한 곳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합니다. 잠시 학교 문을 닫은 뒤, 1833년 3월 그녀는 같은 뜻을 나누던 신문 디 리버레이터에 광고를 실어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4월부터는 코네티컷은 물론 보스턴, 프로비던스, 뉴욕, 필라델피아 출신의 20명의 소녀들이 크랜달 양의 유색 인종 소녀 학교(Miss Crandall's School for Young Ladies and Little Misses of Color)에 입학했습니다.

새로운 학교에서 학생들은 독서, 작문, 수학, 지리, 역사, 철학, 천문학은 물론 드로잉, 회화, 음악 같은 예술 분야까지 폭넓은 과목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새 학교 개소에 대한 프루던스의 열정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인종차별적 공격의 시작

캔터베리 시민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적대적이었습니다. 많은 백인 시민들이 흑인 여성들이 지역 사회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는데, 특히 인종 간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경고와 협박, 그리고 학교를 향한 첫 번째 폭력 행위에도 프루던스 크랜달이 굴복하지 않자, 시민들은 회합을 열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1833년 5월, 코네티컷 주는 도시의 승인 없이 타주 출신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을 받아들이는 학교의 운영을 금지하는 이른바 ‘흑인법(Black Law)’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순간부터 프루던스와 학생들에게는 모든 문이 닫혔습니다. 상인들, 마차 운전수, 심지어 의사들조차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웃들은 학교 우물에 독을 넣었고, 학생 중 한 명인 안나 엘리자 해먼드(Anna Eliza Hammond)는 잠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루던스와 학생들은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극도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교육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폭력의 정점

7월, 프루던스 크랜달은 체포되어 하룻밤 동안 수감된 뒤 재판을 기다리며 석방되었습니다. 뉴욕의 폐지론자 아서 태판(Arthur Tappan)은 그녀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도록 1만 달러를 기부하며 지원했습니다. 두 차례의 재판과 항소 끝에 프루던스는 최종적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답변은 캔터베리 주민들의 폭력이 더욱 격화되는 형태로 돌아왔습니다. 폭도들은 쇠몽둥이로 창문을 깨부쉈고, 9월에는 학교가 방화로 불탔습니다. 학생들과 자신의 안전을 염려한 프루던스는 다음 날 학교를 영구 폐쇄했고, 다시는 실험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프루던스는 침례교 목사 캘빈 필레오(Calvin Philleo)와 결혼하여 매사추세츠에 정착했으며, 이후 뉴욕, 로드아일랜드를 거쳐 마침내 일리노이로 이주했습니다. 187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프루던스는 남동생 헤제키야(Hezekiah)와 함께 아칸소로 자리를 옮겼고, 1890년 1월 28일 그곳에서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코네티컷은 1838년 흑인법을 폐지했습니다. 오늘날 프루던스 크랜달은 흑인 여성의 교육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인물로서 코네티컷주의 공식적인 영웅으로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