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 카를로타 루쿠미(Carlota Lucumí)는 쿠바 트리운비라토(Triunvirato)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노예제에 맞선 투쟁에서 영웅이자 순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내 친구"라는 이름의 민족
카를로타 루쿠미는 아메리카 유럽 식민지 노예 반란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노예들의 삶을 담은 기록 자체가 드물고, 대부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관련 정보의 상당수는 식민지 당국이 탄압 기간 동안 확보한 노예들의 진술에서 나오는데, 이때 증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으려면 말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 태어난 카를로타는 루쿠미(Lucumí)족에 속했다. '루쿠미'는 요루바어로 "내 친구"라는 뜻으로, 서아프리카(나이지리아, 베냉, 가나, 토고, 코트디부아르) 출신 요루바족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삼각 무역의 일환으로 유럽 정착민들에 의해 쿠바로 끌려가 노예로 팔렸다. 카를로타 본인도 아바나 동쪽 마탄사스(Matanzas) 주에 있는 트리운비라토의 사탕수수 농장(ingenio)에서 율리안 알폰소 이 솔레르(Julián Alfonso y Soler)가 소유한 노예였다. 남겨진 노예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감독관의 딸에게 폭력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843년 노예 반란이 일어났을 때, 카를로타는 그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스페인 식민 지배 아래의 쿠바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 1762년 잉글랜드의 짧은 점령기를 제외하면, 151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와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등 최초의 정복자들이 도착한 이래 계속되어 온 긴 식민 통치였다. 섬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여러 집단을 합쳐 1만 5천 명에서 6만 명 사이로 추정되며 타이노족과 카리브족이 주류였다—은 정복자들이 들여온 질병과 가혹한 노예 생활로 인해 빠르게 몰락하고 사라졌다.
원주민들은 점차 아프리카 노예들로 대체되었는데,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가 섬에 발을 디딘 것은 1513년이었다. 그러나 노예 수가 폭증한 것은 주로 18세기 말부터였다. 1791년 아이티 혁명이 시작되자 많은 프랑스 정착민들이 인근 산토도밍고 섬에서 도망쳐 노예들을 데리고 쿠바로 피신했다. 이후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도 더 많은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끌어오기 시작했는데, 주로 요루바족, 반투족, 폰족, 에웨족, 아바쿠아족 등 서아프리카 여러 민족이었다. 1790년 쿠바에는 8만 5천 명의 노예가 있었으나, 1827년에는 28만 7천 명으로 급증했다.
섬의 노예들은 커피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견디기 힘든 조건 속에서 착취당했다. 기독교로 강제 개종된 루쿠미 사람들은 요루바 전통 종교에 바탕을 둔 융합 종교인 '레글라 데 오차(Regla de Ocha)', 즉 '레글라 루쿠미(Regla Lucumí)'를 믿었으며, 스페인 정착민들은 이를 멸칭으로 '산테리아(santería)'라고 불렀다.
끓어오르던 노예 반란
노예의 대량 유입, 플랜테이션의 확장, 경작 방식의 강화, 그리고 1804년 독립으로 이어진 아이티 혁명의 선례까지—19세기 전반기 쿠바를 뒤흔든 이러한 변화들은 백인 정착민들 사이에서 가장 큰 공포, 즉 노예 반란에 대한 두려움을 되살렸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자유 박탈과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에 항거하는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모두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843년 12월, 설탕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 출신의 쿠바 정치인 미겔 데 알다마(Miguel de Aldama)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Se nota cada dia mayor firmza en ellos, mayor tendencia a rebellion y a disputar a viva fuerza sus derechos. Afortunadamante en nuestras fincas siguen hasta lo presente en la mayor tranquilidad – Pero, ¿extrañariamos que hombres esclavos se levantaran y pelearan por su libertad?"
(그들은 날마다 더 굳건해지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성향이 커지며, 자신의 권리를 힘으로 쟁취하려 든다. 다행히 우리 농장에서는 지금까지 매우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노예들이 일어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반란의 도화선
1843년은 플랜테이션과 사탕수수 농장(ingenio)에서 노예 반란이 끊이지 않던 소란스러운 해였다. 반란은 식민지 개척자들의 눈을 피해 조직적으로 준비되었다. 노예들은 북소리를 이용해 농장에서 농장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아카나(Acana) 농장에서는 에바리스토(Evaristo)와 페르미나(Fermina)라는 두 루쿠미 노예가 반란의 신호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마침내 1843년 11월 5일 트리운비라토 농장에서 반란이 터졌고, 효율적인 통신 체계를 통해 인근 농장들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카를로타 루쿠미는 에두아르도(Eduardo), 나르시소(Narciso), 펠리페 루쿠미(Felipe Lucumí), 마누엘 강가(Manuel Gangá) 등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반란을 이끌었다. 반군들은 주인들의 집과 제분 시설에 불을 지르고, 노예들을 해방시키며, 주인과 감독관들을 공격하고, 커피 및 사탕수수 재배지를 습격하는 한편 운동의 확산에 힘썼다. 반란은 아카나, 콘셉시온, 산 로렌소, 산 미겔, 산 라파엘 등 다섯 곳의 농장으로 번졌다.
그러나 보복은 처참했다.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수많은 노예가 살해되었다. 11월 말부터 시작된 진압에서 트리운비라토 농장 하나에서만 50~60명이 목숨을 잃었다. 카를로타는 체포되어 1844년 3월 산 라파엘 농장에서 극도로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1843년의 반란들은 훗날 '라 에스칼레라(La Escalera, 사다리)'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탄압 물결 당시 노예들에게 널리 가해진 고문 방식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쿠바가 노예제를 폐지한 것은 1886년으로, 유럽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늦게 폐지한 곳 중 하나였다. 여러 차례의 전쟁 끝에 쿠바의 독립은 1902년에야 국제적으로 승인되었다. 카를로타 루쿠미는 오늘날까지 아프로쿠바인의 노예제 저항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