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로레인 비비언 한스베리(Lorraine Vivian Hansberry, 1930~1965)는 자신의 희곡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최초의 흑인 여성입니다. 그녀는 미국의 인종 차별 철폐 투쟁에 평생을 바친 활동가이자 극작가였습니다.
피에 새겨진 저항 정신
1930년 5월 19일, 인종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태어난 로레인 한스베리는 교사였던 어머니 애니 루이스와 성공한 부동산 중개업자였던 아버지 칼 아우구스투스 한스베리 사이의 네 번째 자녀였습니다. 부모 모두 반인종주의 운동과 시민권 운동에 헌신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1938년, 아버지는 시카고 남부의 백인 거주 지역에 집을 구입했는데,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가족의 이주를 막으려 들었고, 결국 칼 아우구스투스 한스베리는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집을 구입하고 거주할 권리를 쟁취해야만 했습니다.
전국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NAACP) 등 여러 단체에 적극 참여했던 한스베리 가문에는 W.E.B. 듀보이스(W.E.B. DuBois), 폴 로브슨(Paul Robeson) 같은 지식인과 시민권 운동가들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로레인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무엇보다 배신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가족과 인종이다'"라는 신념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1946년, 로레인이 열다섯 살이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훗날 그녀는 미국의 인종차별이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겼다고 말했습니다.
로레인은 시카고에서 교육받은 뒤 매디슨에 위치한 위스콘신 대학교에 진학하여 정치적 활동으로 빠르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1948년에는 공화당 성향의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헨리 월리스(Henry Wallace)의 대선 캠페인에 참여했습니다. 다음 해 여름에는 멕시코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이후 뉴욕에서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명문 더 뉴 스쿨(The New School)에서 수학했으며, 1951년 할렘으로 이주했습니다.
신문 『프리덤(Freedom)』과 언론 활동
1951년, 로레인 한스베리는 폴 로브슨이 발행하고 루이스 E. 버넘이 편집하던 신문 『프리덤』의 편집 스태프로 합류했습니다. 그녀는 W.E.B. 듀보이스를 비롯한 범아프리카주의(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로 묶으려는 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일하며 접수 담당과 편집 보조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여러 기사를 집필했습니다. 특히 노예제 폐지 운동가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의 이름을 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이 주도한 시위 운동 '소저너스 포 트루스 앤 저스티스(Sojourners for Truth and Justice)'에 관해 집필했습니다. 그녀는 미국 내 시민권 운동뿐 아니라 마우마우 봉기(Mau Mau Revolt) 등 아프리카의 반식민지 봉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식민 지배에 맞서는 아프리카인들의 고민과 차별에 맞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고민이 본질적으로 같으며, 모두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주의자였던 로레인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제2의 성』을 깊이 존경했으며, 여성이 "두 배로" 억압받는 만큼 "두 배로" 싸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가능한 모든 평화적 수단으로 이 투쟁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남성들의 연대 또한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한 에세이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만약 어떤 기적으로 여성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단 한 번의 항의도 하지 않는다 해도, 여성의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평온할 수 없는 남성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건포도가 태양 속에서 말라가네(A Raisin in the Sun)』
1953년, 로레인은 출판사 경영자이자 작곡가, 활동가인 로버트 네미로프(Robert Nemiroff)와 결혼하여 10년간 부부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동성애 혐오에 맞서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단체와 언론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글들을 볼 때,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혼 후 남편의 음악적 성공 덕분에 로레인은 전업 작가로서 집필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녀는 시카고의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이 상속금을 받고 그 사용법을 두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담은 희곡 『건포도가 태양 속에서 말라가네』를 집필했습니다.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아버지가 시카고에서 집을 구입하며 겪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1959년, 이 희곡은 시드니 포이티어(Sidney Poitier) 주연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이후 2년간 이 작품은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공연되었습니다. 브로드웨이에 희곡을 올린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로레인은 최고의 작품에 주어지는 뉴욕 드라마 비평가 서클상(New York Drama Critics' Circle Award)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이 작품을 영화용 각본으로 각색하려 했지만, 너무 논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각본은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NBC의 의뢰로 노예제를 다룬 TV 프로그램 『더 드링크 구드(The Drink Gourd)』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역시 방송이 거부되었습니다.
로레인은 계속해서 글을 쓰며 수많은 기사와 에세이를 발표했습니다. 1961년에는 희곡 『킥스 앤 코(Kicks and Co)』의 제작을 맡아 시카고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브로드웨이 상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1963년, 로레인 한스베리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두 차례의 수술에도 종양을 제거하지 못했고, 그녀는 1965년 1월 12일, 자신의 희곡 『시드니 브러스틴의 창문의 표지판(The Sign in Sidney Brustein's Window)』의 브로드웨이 마지막 공연 날 밤,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장례식에서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보낸 추모 메시지가 낭독되었습니다. "그녀의 창조적 재능과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깊은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에게까지 영감을 줄 것입니다."
이후 로버트 네미로프는 그녀가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을 정리하고 일부를 희곡 『젊고, 재능 있고, 검게(To Be Young, Gifted and Black)』로 각색했으며, 이 작품은 1968~1969년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로레인의 절친이었던 니나 시몬(Nina Simone)은 같은 이름의 추모곡을 그녀에게 헌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