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노동자였던 조제핀 팡칼레(Joséphine Pencalet, 1886~1972)는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조차 없던 시절이었던 1925년 5월, 두아르네네(Douarnenez)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젊은 미망인
조제핀 팡칼레는 1886년 8월 18일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어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캉페를레(Quimperlé)의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조제핀은 기관차 기관사 레옹 르레(Léon Leray)와 결혼하여 일드프랑스(Île-de-France)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레옹이 세상을 떠나면서 조제핀은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향인 브르타뉴로 돌아가 피니스테르(Finistère) 주 두아르네네에 있는 샹스렐(Chancerelle) 정어리 통조림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두아르네네 대파업
1924년 말, 두아르네네 항구 노동자들의 '대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20년 전, 펜 사르댕(Penn Sardins, 문자 그대로 '정어리 머리'라는 뜻으로 노동자들을 부르던 별명)이라 불린 이들은 이미 파업을 통해 임금을 성과급 방식이 아닌 시간당 지급받도록 쟁취한 바 있었습니다. 1924년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근무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고, 1919년 법에도 불구하고 초과 근무 수당은 지급되지 않았으며, 원래 여성에게 금지되어야 했던 야간 근로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바로 이 모든 사항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1924년 11월부터 파업은 항구의 모든 공장으로 확산되었고, 파업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한 여성들이 최전선에 나서 "팽 프레알 아 보!(Pemp real a vo!)"("5프레알이 될 것이다", 즉 1.25프랑)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파업은 예비 인력 동원, 공산당 시장 해임, 폭력과 스캔들 등으로 점점 격화되었고, 결국 1925년 1월 46일 만에 파업자들의 요구 일부를 인정하는 합의로 막을 내렸습니다. 두아르네네 금속노조에 관여했던 조제핀 팡칼레는 끝까지 파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당선자
같은 해, 프랑스 공산당은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선거에 후보자를 내세웠습니다. 해임된 공산당 시장 다니엘 르 플랑셰크(Daniel Le Flanchec)의 후보 명단에서 네 번째 자리에 오른 조제핀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 그녀는 1차 투표에서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며 프랑스 최초의 여성 당선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보비니(Bobigny)에서 1차 투표로 당선된 마르트 테송(Marthe Tesson)은 부시장에 올랐고, 다른 여성들은 2차 투표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조제핀 팡칼레는 몇 달 동안 두아르네네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1925년 11월, 국무원(Conseil d'État)은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으므로 투표 의결체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당선을 무효로 선언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결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조제핀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씁쓸함과 분노를 안은 채 다시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짧은 임기에 그쳤지만, 조제핀 팡칼레는 정치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