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타니아'로 더 잘 알려진 아이데 타마라 분케 비더(Haydée Tamara Bunke Bider, 1937~1967)는 공산주의 혁명가로,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이끄는 부대에 유일하게 합류해 싸운 여성입니다.
정치 열기 속에서 자란 소녀 시절
나치즘이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자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던 독일인 공산주의자 부부, 나디아 비더와 에리히 분케의 딸로 태어난 아이데 타마라 분케 비더는 1937년 11월 1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녀와 남동생 올라프는 정치적으로 매우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들의 집에는 난민과 정치 활동가들이 드나들었고, 지하 출판물의 거점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무기를 숨겨두는 은닉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타마라는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이자 재능 있는 운동선수로 성장하며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52년 가족은 동독의 슈탈린슈타트(Stalinstadt)로 이주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학업을 이어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이후 곧 독일 사회주의통일당과 세계민주청년연맹에 가입했으며, 이 조직의 활동으로 빈, 프라하, 모스크바, 하바나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했습니다.
쿠바로의 이주
출신 배경과 학업 덕분에 타마라는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다섯 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곧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국제부의 통역사로 일하게 되었고, 이 직무를 통해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들과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1960년에는 쿠바 대표단과 함께 동독을 방문한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를 만나 인연을 맺습니다.
쿠바 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은 타마라는 이듬해인 1961년 쿠바로 건너갑니다. 처음에는 쿠바 시골에서 자원봉사자로 주택과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녀의 능률성, 활동력, 봉사 정신은 금세 주목받았고, 젊은 그녀는 쿠바 문맹 퇴치 캠페인에 참여하도록 발탁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교육부 산하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라우라 구티에레스 바우어로서의 잠입
체 게바라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의 불씨를 남미 전역으로 확장하고자 했고, 타마라는 볼리비아 원정에 투입될 요원으로 선발됩니다. 다리엘 알라르콘 라미레스(Dariel Alarcón Ramírez)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으며 그녀는 무기 사용법과 무전기를 이용한 암호 메시지 송수신 기술을 익혔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녀는 '타니아'라는 전투 이름을 갖게 됩니다. 훈련소에서 그녀는 뛰어난 지략과 실력은 물론, 사교적이고 친근한 성격으로도 동료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1964년 10월, 타마라는 라우라 구티에레스 바우어(Laura Gutiérrez Bauer)라는 가명으로 볼리비아에 입국합니다. 그녀의 임무는 볼리비아 정치 엘리트와 군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명하고 재능 있는 그녀는 민속 음악 전문가로 위장하여 빠르게 라파스 상류 사회에 스며들었고, 심지어 르네 바리엔토스(René Barrientos) 대통령과도 친분을 쌓아 함께 페루로 휴가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볼리비아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젊은 볼리비아인과 결혼까지 감행했습니다.
"내 이름은 언젠가 잊히고 말까"
처음에 그녀는 아파트에 몰래 숨겨둔 무전기를 통해 하바나의 피델 카스트로와 현장의 체에게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1966년, 정보망의 취약점이 드러나면서 그녀는 여러 차례 냐카와수(Ñancahuazú)에 있는 체의 캠프를 직접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이동 중 한 번, 체포된 공산주의 요원이 타마라가 지프와 주소록을 남겨둔 안전가옥의 위치를 실토하면서 그녀의 위장 신분은 결국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신분이 들통난 그녀는 현장에서 체의 부대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릴라 부대에서 타마라는 무선 통신과 보급을 담당했으며, 47명의 게릴라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타마라가 보내오던 정보가 끊기자 혁명가들은 고립된 처지에 놓였고, 체는 소규모 부대 단위로 캠프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1967년 8월, 혁명가들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던 중 매복 공격을 받습니다. 타마라는 허리까지 물에 잠긴 상태에서 두 번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며칠 후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현지 농촌 여성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집단 매장지에 버려지는 대신 기독교식 장례로 묻혔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접한 피델 카스트로는 '게릴라 타니아'를 쿠바 혁명의 영웅으로 추대했습니다. 체 게바라는 한 달 뒤 포획되어 처형됩니다. 1966년, 타마라 분케는 한 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이름은 언젠가 잊히고 말까,
그리고 이 땅에 나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