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58. 영국은 몰랐다, 사르다르 파텔이 살과 피가 아닌 강철로 만들어진 남자였음을

58. 영국은 몰랐다, 사르다르 파텔이 살과 피가 아닌 강철로 만들어진 남자였음을

런던 원탁회의의 냉혹한 대답

원탁회의(Round Table Conference)가 끝난 후, 간디는 런던에서 인도 담당 장관 호어(Samuel Hoare)를 직접 찾아가 인도 문제의 해결을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호어의 대답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줄 것은 없으며, 이제는 국민회의(Congress)의 존재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931년 12월 28일, 간디는 또다시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부왕 윌링던 경(Lord Willingdon)은 국민회의를 불법 단체로 선언했고, 1932년 1월 4일 정부는 아무런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사르다르 파텔과 간디를 예르와다(Yerwada) 감옥에 투옥했습니다. 파텔은 이후 16개월간 간디와 함께 감옥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차와 쌀마저 거부한 연대

투옥 기간 동안 간디는 차와 쌀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파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간디가 거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도 거부하며,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디의 세수부터 잔심부름까지, 파텔은 스스로 나서서 간디를 돌보았습니다.

간디가 새벽 4시에 일어나면 파텔도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간디가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면 파텔도 그 시각에 맞춰 몸을 일으켰습니다. 간디가 "조금 더 자도 좋지 않겠느냐"고 권하면 파텔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당신께서 깨어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눈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출옥 후 간디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르다르는 감옥에서 나를 그토록 헌신적으로 섬겨서, 마치 어머니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슬픔 속에서도 굽히지 않은 의지

파텔이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특정 조건을 전제로 석방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파텔은 오직 무조건적인 석방만을 요구했습니다.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그는 감옥 안에서 홀로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33년, 더 큰 슬픔이 닥쳤습니다. 형 비탈바이(Vithalbhai)가 해외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유해는 장례 의식을 위해 봄베이로 운송되었습니다. 모두가 발라브바이가 장례식에 참석하기를 바랐지만, 정부는 또다시 조건부 석방을 내걸었고 그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정부는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 남자는 뼈와 살이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요.

강철을 꺾을 수 없다

긴 투옥 생활 속에 발라브바이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코의 통증이 날로 심해져 호흡조차 곤란해졌고, 의료진은 즉각적인 수술을 권고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무조건 석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4년, 파텔은 마침내 예르와다 감옥의 문을 나섰습니다. 그는 곧장 봄베이로 향했고, 오랜 고통 끝에 코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조건 앞에서도, 슬픔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강철 같은 남자, 그것이 바로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