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장녀 안나 콤니나(1083~1153년경)는 역사가이자 작가로, 그녀의 저작 『알렉시아드』는 비잔티움 정치사를 연구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풍파 속의 비잔티움 제국
안나 콤니나는 1083년 12월 1일 또는 2일, 황후 이리니 두카스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입니다.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은 아버지는 안나가 태어나기 2년 전, 제국을 뒤흔들던 소요와 반란을 틈타 일으킨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어머니 이리니는 열한 살 무렵에 결혼했으며, 첫 아이를 낳을 때 겨우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사방에서 위협받는 제국을 통치해야 했습니다. 발칸반도에는 노르만족이, 아시아 방면에는 셀주크 튀르크와 페체네그족이 압박해 왔고, 달마티아와 아나톨리아 남부의 킬리키아에서도 소요가 끓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재정 상태도 극히 나빴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 초기 강경하고 인기는 없었지만 효과적인 개혁으로 제국 재정을 바로세운 뒤 노르만족의 침공을 물리쳤고, 이어 셀주크 튀르크와 페체네그족의 공격도 막아내며 조금씩 상황을 수습해 나갔습니다.
영향력 있는 여성들에 둘러싸인 유년기
안나는 태어나자마자 콘스탄틴 두카스와 약혼합니다. 어머니 이리니의 사촌이자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가문의 후손인 그는 1071년부터 1078년까지 황제였던 미카일 7세의 아들로, 아버지에 의해 이미 권력과 연결된 인물이었습니다. 강대한 두카스 가문과의 동맹을 잃지 않기 위해 알렉시오스 1세는 1083년 콘스탄틴을 공동 황제이자 적법한 후계자로 선포했습니다. 안나는 장녀로서, 그리고 약혼을 통해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소녀 안나를 둘러싼 여성들 역시 그녀의 계승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알렉시오스의 어머니인 할머니 안나 달라세네는 황제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남편의 즉위를 위해 애썼으나 헛수고로 끝나자, 이번에는 아들을 황좌에 앉히기 위해 은밀히 움직인 인물이었습니다. 안나는 저술에서 할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할머니는 국정 처리에 너무나 현명하고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운영하는 데 너무나 능숙하여, 로마인들의 제국은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제국이라도 다스릴 수 있는 분이었다."
시어머니의 적대감을 받으며 다소 물러나 있는 위치였지만, 어머니 이리니 두카스 역시 지적이고 교양 깊은 여성으로 문학 살롱을 운영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원정에 정기적으로 동행하며 국정에도 개입했습니다. 또한 안나는 여덟 살부터 콘스탄틴 두카스의 어머니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그녀는 마리아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습니다. 아들의 이익을 보호하던 마리야는 아들이 공동 황제로 임명되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안나를 둘러싼 영향력 있는 여성들은 황녀가 황위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황좌에서 밀려나다
이리니와 알렉시오스는 둘째 딸 마리아를 낳았고, 이윽고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납니다. 이 출생은 안나와 콘스탄틴의 계승 순위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4년 뒤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안나의 약혼자는 지위를 잃었고, 그의 어머니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수녀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콘스탄틴은 2년 후 사망했고, 안나는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안나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탁월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과학, 천문학, 기하학, 산술, 의학은 물론 음악, 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호메로스 등 고전 작가들을 두루 공부했습니다. 훗날 그녀의 저술은 이러한 과학적 지식과 폭넓은 교양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의 결혼
열네 살이 된 안나는 자신보다 스무 살 위의 장군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결혼합니다. 알렉시오스 1세가 크게 신임하던 그는 바로 앞서 '카이사르'와 '판훔페르세바스토스'의 칭호를 받은 참이었습니다. 정치적 이유와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진실한 애정으로 결속된 부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나는 저술에서 남편을 극찬했습니다.
"내 적법한 남편은 카이사르 니케포로스였다. (...) 그는 미모와 뛰어난 지성, 정확한 화술 면에서 동시대 사람들을 훨씬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를 보는 것,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두 딸과 두 아들,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딸처럼 이리니 역시 니케포로스를 매우 아꼈습니다. 이리니와 안나는 알렉시오스에게 그를 후계자로 지목하도록 압박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118년 황제가 임종에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다시 요안니스의 계승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알렉시오스는 아들에게 제국의 반지를 건네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숨지기도 전에 요안니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군중 앞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실패가 두 여성을 좌절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안나는 동생을 폐위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지만, 남편은 여기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시도는 좌절되었고, 안나와 이리니는 이리니가 몇 해 전 직접 설립한 '케카리토메네' 수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알렉시아드』의 집필
수도원에서 이리니는 자선 활동에 몸바치다가 1127년 세상을 떠났고, 니케포로스는 10년 뒤 뒤따라갔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 치세의 역사를 쓰겠다고 착수했던 그는 1079년까지의 내용만 남긴 채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붓을 잡은 이가 바로 54세의 안나 콤니나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치세와 업적을 온전히 다룬 저작, 『알렉시아드』를 집필했습니다.
15권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는 영웅담(epic)의 형식을 따릅니다. 남편의 단순하고 전형적인 문체와 달리, 안나는 더욱 복합적이고 세련된 표현을 구사하며 인용구, 속담, 고전 인용으로 글을 장식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의 무훈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 마음을 찢어놓았던 사건들에 대한 애가를 쓰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종종 개인적인 목소리를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그녀는 이렇게 쓰디쓰게 회고했습니다.
"나의 평생은 폭풍과 격변의 연속이었다. [...] 그러나 내 불행의 이야기가 어떤 존재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해도, 사태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내 대의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드는 이도 없었다."

『알렉시아드』는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와 11·12세기 동로마 제국의 정치사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입니다. 또한 제1차 십자군에 대해 당대 비잔티움 측의 시각과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닙니다.
안나 콤니나는 1153년 또는 1154년, 약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