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발견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름을 함유한 암석이 노출된 곳마다 역청은 단열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기름을 미라 제작에 활용했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화장품과 조명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근대 석유 산업은 1859년 여름, 엔지니어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가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시추 작업 중 석유가 솟구치는 것을 목격하면서 공식적으로 탄생했습니다.
기름의 역사: 고대의 미라...
성경은 노아의 방주를 방수 처리하는 데 사용되었던 이 화석 자원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3,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지표로 스며 나온 역청이 성벽 건설의 모르타르로 쓰였고, 선박 선체의 코킹(방수 처리), 물탱크와 수도관 밀봉, 심지어 약재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길고 복잡한 미라 제작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재료였습니다.
중세 시대에 석유는 비잔틴 제국의 강력한 무기, 이른바 '그리스의 불'로 재탄생합니다. 배에서 투척하는 기름과 초석이 담긴 테라코타 수류탄으로, 폭발하면 기름이 흘러나온 뒤 불이 붙어 물 위로 퍼지며 인근 선박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1264년 마르코 폴로가 바쿠(아제르바이잔)를 방문했을 때, 그는 "수백 척의 선박을 채울 수 있는 양으로 수집된" 지표 유출 석유를 목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1594년 초에는 이 지역에 깊이 35m의 유정이 파였고, 1830년에는 무려 116개의 유정이 하루 720배럴을 생산했습니다. 한편, 소금 광산에서 쓰이던 기술(케이블 끝에 매달린 추의 진자 운동으로 만든 왕복 운동을 지표에서 전달하는 방식)을 시추에 처음 적용한 인물은 드레이크가 아닙니다. 러시아 엔지니어 세묘노프(Semyonov)가 1854년 초 바쿠에서 이미 이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산업 시대의 거대 기업들에게
산업 혁명은 새로운 연료에 대한 갈망을 낳았습니다. 혁명이 초래한 사회적 격변은 저렴하면서도 품질 좋은 등유(램프용 기름)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고래기름은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수지 양초는 불쾌한 냄새를 풍겼으며, 가스등은 도시 지역의 현대식 주택과 아파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은 램프 연료를 찾으려는 노력은 '암석유', 즉 원유에 대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19세기 중반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상업적 활용을 위한 정제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더 큰 규모의 원유 공급원을 찾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물과 소금을 얻기 위해 판 우물에서 기름이 새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여기서 석유 시추라는 아이디어가 탄생했습니다. 최초의 유정은 1857년 독일에서 시추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에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1859년 8월 27일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에드윈 L. 드레이크(Edwin L. Drake)가 주도한 시추 사업이었습니다. 드레이크는 석유 노두의 근원인 '어머니 지하수층'을 찾기 위해 굴착 작업을 벌였습니다.
드레이크가 '창시자'로 기념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의 초기 석유 산업이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을 비롯한 대기업 중심으로 구조화될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접근이 쉽지 않은 지역의 탐사와 중장비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을 동원한 것은 바로 이들 기업이었으며, 워싱턴에서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활동할 국가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오늘날 석유 회사들은 글로벌 생산량을 공급하기 위해 매일 수백만 배럴을 추출하고 있습니다. 환경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석유 기업들의 연구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셰일 오일 채굴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석유 발견의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다면
- 『블랙 골드: 석유의 위대한 역사』, 마티외 오자노(Mathieu Auzanneau) 지음, La Découverte 출판사,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