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비잔틴 제국의 운명을 바꾼 로마노스 4세 vs 알프 아르슬란의 결전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비잔틴 제국의 운명을 바꾼 로마노스 4세 vs 알프 아르슬란의 결전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8월 26일)는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과 알프 아르슬란이 지휘하는 셀주크 투르크 군대가 격돌한 대규모 회전입니다. 승리를 거둔 셀주크는 이후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거의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투르크 세력의 동방 정복은 훗날 제1차 십자군을 정당화하는 핵심 명분으로 자주 거론됩니다.

아바스 왕조 군대의 노예 병사 출신이었던 투르크인들은 10세기에 정치적 중요성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칼리프가 하사한 '술탄' 칭호에 힘입어 공국을 분할하고,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투르크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11세기에 해당 지역의 판도를 주도하며 비잔틴 제국마저 위협한 세력이 바로 셀주크족이었고,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와 비잔틴 간 갈등의 정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셀주크족, 이슬람 동방의 주도권을 잡다

11세기 무렵까지 이슬람 사회에 속해 있던 투르크인들은 대체로 군인 노예(맘루크) 출신이었습니다. 9세기부터 그들은 칼리프 근위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그들의 처첩들은 바그다드의 하렘에서 생활했습니다. 한편 칼리프에게 복무하며 이슬람화된 또 다른 유목민 투르크 민족들이 이슬람 동방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10세기에 들어 아바스 왕조 칼리프가 쇠약해지자, 부이드 시아파의 집권은 오히려 투르크인들의 입지를 더욱 굳혔습니다. 이들은 군대는 물론 행정부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때로는 '비즈리어(재상)'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습니다.

11세기에 영향력을 행사한 투르크 민족 중에는 셀주크(그의 이름이 왕조의 이름이 됩니다)가 이끄는 오구즈(Oghuz)族이 있었습니다. 1030년대에 이들은 동방의 가즈나 왕조와 부이드 왕조의 지배를 약화시켰고, 1055년에는 술탄 투그릴 베이(Tuğrul Bey)가 바그다드에 입성하면서 아바스 칼리프 알 카임(al-Qâ'im)의 보호자로서 무력을 앞세워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이들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부이드 세력을 아바스 수도에서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셀주크의 팽창은 이라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투그릴 베이의 후계자 알프 아르슬란(1063년 즉위)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한층 서쪽, 특히 아나톨리아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는 곧 시리아와, 바그다드의 경쟁 칼리프인 카이로 파티마 왕조의 영토에도 위협이 되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 직전, 셀주크는 정복 열기가 절정에 달해 있던 것입니다.

내분으로 약화된 비잔틴 제국

11세기는 비잔티움에게 다시 내부 분열의 시대였습니다. 1025년 바실리오스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고, 마케도니아 왕조를 계승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황제를 '옹립'하는 자들은 그의 딸들이었으며,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1042~1055)의 비교적 긴 통치에도 불구하고 불안정성은 반세기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권력 다툼은 마케도니아 왕조뿐 아니라 디오게네스 가문,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콤네노스 가문 등 대귀족 세력들 간의 대립 양상을 띠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1054년 로마 교회와의 분열로 유명한 인물)의 지원 덕분에 잠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 바로 콤네노스 가문의 대표자 이삭 콤네노스였지만, 그는 아무리 유능해도 빠르게 지쳐 불과 2년 뒤 콘스탄티노스 10세 두카스에게 자리를 내려주어야 했습니다.

새 황제의 통치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페체네그족, 노르만족, 그리고 곧 투르크족 등 사방의 공격자들에게 사실상 끊임없이 포위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투르크족은 1060년대부터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바로 이 무렵 콘스탄티노스 10세(1067년)가 사망합니다. 그의 아내 에우도키아가 섭정으로 뒤를 이었고, 아들 미카엘 7세 두카스가 황제로 옹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우도키아는 곧 실질적 제국 권력을 장악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와 재혼합니다.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는 불안정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 적, 특히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군사 원정을 결심했고, 이것이 바로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집니다.

만지케르트 전투, 재난의 시작인가?

아나톨리아에 대한 투르크의 공격은 1050년대 초 투르코만족의 약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미 1054년 투그릴 베이는 만지케르트 요새 앞에서 발이 묶였고, 바실 아포카페스와 프랑크 용병 수비대에 의해 격퇴된 바 있습니다.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권력을 잡았을 당시, 셀주크의 관심은 오랜 숙적 파티마 왕조에 향해 있었습니다.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시리아의 알레포를 공격하는 중이었고, 당분간 비잔틴령 아나톨리아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1071년 초 만지케르트 요새를 정복했으나, 시리아 원정을 위해 비잔틴 제국과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비잔틴 황제는 이 기회를 활용해 약 7만 명에 달하는 군대의 훈련과 장비를 마무리하며 공세를 준비했습니다.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비잔틴 제국의 운명을 바꾼 로마노스 4세 vs 알프 아르슬란의 결전

1071년 3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넌 바실레우스(황제)는 군대를 둘로 나누기로 결정하는데,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략가 요세프 타르카니오테스가 지휘하는 최정예 부대는 북쪽으로 파견되어 노르만 용병 루셀 드 바이외(Roussel de Bailleul)의 병력과 합류해야 했습니다. 일부 사료는 알프 아르슬란의 기습 공격으로 인한 패배를, 다른 사료는 전략가와 노르만 용병의 배신을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만지케르트는 비교적 수월하게 탈환되었지만, 알레포 포위를 포기하고 돌아온 투르크군과 마주하자 바실레우스는 자신의 군세가 약화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군대는 밤낮으로 셀주크 궁수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술탄은 특히 치열한 전투에서 자신의 우위를 확신하지 못해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황제로서는 투르크의 위협을 차단하고 흔들리는 자신의 권력을 합법화하며, 승자의 자격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개선하기 위해 이 승리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양측은 전투 대형을 갖춥니다.

1071년 8월 26일, 바실레우스는 군대(약 5만 명 이상으로 추정)를 여러 줄의 긴 종심 대형으로 배치하고 기병대를 좌우 익에 배치했습니다. 황제의 주위에는 유능한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비롯해,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조카이자 황제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등 여러 장수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약 3만의 셀주크군은 비잔틴군이 전진하도록 유도한 뒤 초승달 모양으로 진형을 펼치고, 궁수들의 화살이 쏟아지는 비잔틴군의 측면을 유린했습니다.

대열 중앙에 선 비잔틴 황제는 알프 아르슬란의 정면 대결 회피에 빠르게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해 질 녘이자 밤이 다가오자 황제는 회군을 결심하는데, 바로 그 순간 술탄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여러 설이 전해집니다. 바실레우스는 자신의 죽음 소문을 퍼뜨린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에게 배신당했는가, 아니면 회군 중이던 그리스군이 매복 공격을 받은 것인가?

결과는 같았습니다. 비잔틴군은 술탄의 총공격 앞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술탄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주변의 귀족들은 신속히 전장을 이탈했고 대부분의 용병들도 함께 달아났습니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좌익만이 중앙과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를 엄호하며 저항해 완전한 궤멸과 필연적으로 훨씬 더 극단적인 손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실레우스는 불행히도 부상을 입고 말을 잃었고, 결국 투르크족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만지케르트 패배가 남긴 결과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비잔틴 제국의 운명을 바꾼 로마노스 4세 vs 알프 아르슬란의 결전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은 제국 역사상 이보다 더한 굴욕을 찾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바실레우스의 모호한 정통성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술탄이 포로를 후하게 대해 적절한 몸값을 받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개선하는 환영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미카엘 7세 두카스의 지지자들이 황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나섰습니다. 폐위된 패전 황제는 투옥되고,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은 뒤 수도원에 유폐되어 곧 사망합니다. 새 황제 미카엘 7세 두카스의 어머니였던 그의 아내 역시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몰락으로 제국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불안정은 여전했고 경제 위기는 깊어갔으며,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알프 아르슬란이 내건 관대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의 아르메니아와 아나톨리아 진출은 이듬해부터 현실이 되었습니다. 만지케르트로부터 10년 뒤인 1081년에야 알렉시오스 콤네노스가 등장하면서 출혈이야말로 멈추게 됩니다.

비잔틴에게 만지케르트의 패배가 지진과 같았다면, 투르크 진영은 신속히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알프 아르슬란의 주된 목표는 파티마 왕조와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한 직후 그는 반란 진압을 위해 제국의 동방으로 향해야 했고, 트란속시아나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뒤를 이은 그의 아들 말리크 샤(Malik Shah)는 훨씬 성공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이라크에 셀주크의 지배력을 확립했고, 1072년부터 1087년 사이에 메카, 예멘, 다마스쿠스, 알레포, 마지막으로 바그다드를 정복했습니다! 반면 아나톨리아에서는 셀주크가 투르코만족의 정찮을 허용하는 방침을 취했습니다.

그럼에도 1092년 말리크 샤의 죽음은 셀주크 확장의 종언을 고했습니다. 계승 분쟁, 지역 에미르들의 할거, 파티마 왕조의 여전한 존재감, 그리고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치하 비잔틴의 부흥은 1095년 제1차 십자군 직전 근동 지역의 새로운 분열 국면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군의 구실이 된 만지케르트?

1095년 11월 27일 제1차 십자군을 소집한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주장 가운데에는 투르크의 위협, 특히 투르크의 군사적 상징인 만지케르트 전투가 자주 등장합니다. 투르크인들은 비잔틴 제국은 물론 파티마 왕조를 통해서도 서구에서 나쁜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서방에서는 그들이 예루살렘 순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아나톨리아 횡단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그들이 11세기 초 성묘를 불태운 파티마 칼리프 알 하킴처럼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으리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오히려 셀주크의 정복은 일정 기간 해당 지역을 안정시켰고, 기독교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권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소수민족은 투르크 내부 분쟁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076년 예루살렘이 투르코만 세력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직후 벌어진 학살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만지케르트의 이미지는 눈길을 끄는 일화와 함께 남았습니다. 동방 기독교인들이 셀주크의 정책에 경의를 표하는 목소리(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들의 역사의 저자처럼)는 서방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비잔티움을 구원하고 이교도로부터 성묘를 해방하려는 십자군은 출발 준비를 마친 것이며, 그 이교도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바로 투르크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동방 이슬람과 투르크, 그리고 서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연도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1차 십자군의 원인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참고문헌

- J.J. Norwich, 비잔티움의 역사(330-1453), Perrin, 1999.

- J-C Cheynet,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 A. Colin, 2006.

- C. Picard, 11~15세기 이슬람 세계, A. Colin, 2001.

- P. Jansen, A. Nef, C. Picard, 이슬람 국가와 라틴 세계 사이의 지중해(10세기 중반~13세기 중반), Sedes, 2000.